조용한 사과

by 김봄빛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총 3 권인데 무엇을 먼저 읽을까 생각하다가 그림이 예쁜 책을 집어
들었다. 점심을 먹고 과일까지 챙겨 먹은 후, 앉은 자리에서 꼼짝 않고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가슴이 저릿해지는 그 동화는, 진돗개 ‘흰돌이'와 시인 아저씨의 따뜻하고도 슬픈 이야기를 그
린 박상률 작가의 《개밥상과 시인 아저씨》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때 우리 집엔 수컷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를 ‘구야’라고
불렀다. 대문 옆 큰 감나무에 묶여져 있었던 구야는 식구 중 유일하게 나만 보면 미친 듯이
짖어댔다. 짖는 게 다가 아니라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데 눈에서는 실제로 시퍼런
불빛이 번득였다. 왜 유독 나에게만 그랬는지 모를 일이었는데, 언젠가 누가 말하기를 내 걸
음걸이가 남과 달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일리 있는 말 같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눈만
뜨면 보는 주인집 큰딸을 몰라보는 구야는 분명 똥개였다. 책에 나오는 ‘시인 아저씨’는 ‘똥사
람 없듯이 똥개도 없다’ 했지만, 그건 ‘흰돌이’ 같이 똑똑한 개를 곁에 둔 시인 아저씨의 남의
속 모르는 말씀이다. 나도 동물을 꽤나 좋아한다. 그렇지만 나만 보면 송곳니를 드러내고 눈
에서 광기를 뿜어대던 구야를 품어 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줄이 풀리는 바람에 차도로 뛰어나가 차에 치여 죽은 구야를 향한 내 맘은 그저 뉘
집 개가 죽었나보다, 안 됐네 정도였다. 내게 구야는 식구로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나’는 내 딸이 기르는 개다. 루나가 우리 집에 머무는 날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침이
되면 모든 방을 돌아다니며 식구들에게 아침 인사를 한다. 제법 똑똑하다. 루나의 혓바닥이
내 얼굴에 닿는 걸 아직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딱히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내가 부르
면 금방 다시 갈망정 그래도 와 준다. 말 그대로 와 주는 거다. 하루는 내가 루나의 얼굴 가
까이 내 얼굴을 갑자기 들이대자 나의 행동에 놀란 루나가 ‘왕’하고 내 코를 덥석 물었다. 그
렇게 갑자기 다가가면 개가 놀란다고 딸이 여러 번 주의를 주었건만 너무 사랑스러운 마음에
나도 몰래 그랬던 거였다. 내가 화들짝 놀라 얼굴을 뒤로 빼며 코를 움켜쥐었다. 놀라운 건,
루나는 내 코를 무는 시늉만 했지 실제로 제 입속에 들어 간 내 코를 물지는 않았단 사실이
다. 어쨌거나 놀란 내가 울상이 되자 루나가 내 앞에 다소곳이 앉아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처음 보는 몸짓이었다. 내 보기에 루나의 그 모습이, 사람으로 치자면 괜찮
냐? 미안하다고 사과 하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말 못하는 개지만 루나는 조용히 내게 사과를
전해왔고 나는 그 사과를 받았다. 그것은 바로 교감이었다. 내가 개와 교감을 이루다니, 루나
가 사람처럼 느껴졌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머무는 시간이 지나면 나와 남편은 미국으로 돌아갈 거다.
그때가 되면 큰 개를 한 마리 기를 생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개를 기른다기보
다 그 개가 나를 돌봐줄 거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서, 개와 주인이 오래도록 함께 하
는 시간을 거쳐, 그 개가 주인이 필요한 일을 도와줄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는 프로그램이 있
다고 딸이 알려 준 적이 있다. 이제 개와의 교감도 맛보았으니 《개밥상과 시인 아저씨》에 나
오는 ‘흰돌이’처럼 똑똑하고 튼튼한 개를 만나고 싶다. 서로 교감하며 기대고, 아껴주며 오순
도순 살 테다 나의 동반자이자 보호자인 남편과 나 그리고 . , 나의 또 다른 보호자 개와 함께
사는 우리 집에, 아들과 딸이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오고, 그 아이들과 내 개가 함께 장난치
며 놀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 모습을 남편과 내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겠지. 따뜻한 행
복감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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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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