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는 양친부모 다 살아계시지?
양보를 강요 당했다. 아니, 그건 강요라기보다 강탈이었다.
평점 94점을 받고도 장학금을 놓쳤다. 이해가 되지 않아 교수실을 찾은 건 여름방학 중 어느 날이었다.
“어떻게 왔는가?”
이러이러해서 왔습니다 했다. 내 대답에 교수님은 첫 마디에 ‘양친부모’를 언급하셨다.
“형편이 안 좋은 친구에게 양보 하시게.”
언제부터 장학금의 조건에 양친부모가 포함 됐던가! 양친부모가 살아 계시는 학생이 나뿐은 아닐 텐데 왜 하필 나인가? 어떤 이유에서이건 나를 희생양으로 뽑았다면, 사전에 나에게 동의를 구했어야 옳지 않은가? 내 속은 부당하다고 외치고 있었으나 내 거죽은 대꾸 한마디도 제대로 못한 채 교수실을 나왔다. 대학을 마치려면 아직 1년 반이라는 시간이 남았고 대학원으로 진학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교수님과의 얼굴 붉히는 논쟁은 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교수님의 ‘옳지 못한 권위’에 억눌린 게다. 더군다나 교수님이 꺼내든 ‘양친부모'라는 카드는 내게 아주 주효하게 먹혔다. 그 한 단어에 내 ‘알량한 동정심’이 제대로 발동했으니까.
그 당시에 우리 과에는 사흘에 피죽도 한 그릇 못 먹은 듯 초췌한 몰골로 강의실을 드나드는 남학생이 한 둘 있었는데 아마도 그 남학생에게 내 몫이 돌아간 게 아닌가 싶었다. 내막이야 어찌 되었건 나는 그렇게 생색도 한번 못 내보고 억울하게 내 거를 강탈 당했다. ‘내 거’라기보다는 내 등록금을 내주는 ‘내 엄마 거’였다.
지금 이 시대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가만있는 학생은 없을 게다. 그런 일을 벌이는 교수님도 없을 테고. 1986년 그때는 그렇게 주먹구구식인 게 많았다. 남편도 비슷한 일이 있었단다. 여름 방학 동안 일을 하는 근로 장학생에 지원을 해 둔 어느 날 교수님이 부르셨단다. 처지가 안 좋은 학생이 있으니 그 일을 양보하면 안 되겠느냐는 물음에 남편은 단호히 ‘안 된다’ 했단다. 그도 일한 대가로 받은 돈으로 꼭 사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보할 의사가 있는지 타진해 본 걸 나무랄 수는 없다.
지난 설날에 엄마를 만났을 때 그 사건에 대해 기억하시냐고 여쭤봤다. 엄마는 예나 지금이나 근검, 절약, 알뜰함의 대명사이다. 그렇게 당신은 당신을 위해 한 푼을 허투로 쓰지 않으면서 시동생 대학 등록금에, 시누이 결혼 자금에, 이웃의 일까지 수시로 사람들을 도와가며 살아오셨다. 내가 장학금을 ‘강탈’ 당했을 때도 엄마는 아무 말씀 없으셨기에 그 옛날 일에 대해 여쭤보았다.
“우리 딸이 공부 잘 한 거만 해도 좋더라. 무슨 말을 하겠노? 양친부모도 없는 아가 등록금이 없다카는데……”
엄마의 대답은 딱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울 엄마가 내 엄마라서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