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수저’

by 김봄빛

‘자신을 대단치 않은 인간이라고 폄하해서는 안된다. 그같은 생각은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옭아매려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맨 먼저 자신을 존경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을, 아직 아무런 실적도 이루지 못한 자신을 인간으로서 존경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중에서


한동안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딸이 대학에 입학하고 기숙사로 들어 간 후부터 나의 하루 하루는 바쁠 일도 없고 특별히 할 일도 없는 가운데 축축 늘어져만 갔다. 일찍 일어나서 학교 가는 아이 도시락을 싸고 아침밥을 챙겨줄 일도 없어졌고 학교에서 돌아올 딸을 위해 간식을 준비해 놓고 픽업을 가는 일도 사라졌다. 회사일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일이라 손을 놓고 있었다.

늦게 일어나고 하루 종일 어떻게 빈둥거리든 태클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우울감이 찾아들었다. 남편은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해보라고 권했다. 그림 그리기, 집안 꾸미기, 요리하기, 붓글씨 쓰기, 쇼핑하기 등 내가 좋아하는 일들은 꽤 있었으나 그 당시엔 그 어느 것 하나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내 자신이 하찮게 느껴지고 모든 게 시들했다. 굳이 병명을 찾자면 ‘빈 둥지 증후군’이라고 하겠으나, 그렇다고 하기엔 증상이 무거웠다. 머리로는 부정했지만, 몇 년 전에 했던 수술의 경과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한 큰 실망감이 내 깊은 내면에 자리를 틀고 있었던 것 같다.

급기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건 내 존재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의문이었다. 사춘기 없이 지났던 게 화근이었을까? 일찌감치 내게 했어야 할 질문을 지금에서야 하고 있다니…. 나는 누구의 아내고 누구의 엄마란 것 외에 나 자신만 놓고 보면 내가 누군지에 대한 선명한 대답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성당으로 하느님을 만나러 갔다. 안 만나주셔도 좋았다. 조금 더 하느님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성당 제대 맞은편의 큰 문과 제대 뒤쪽으로 들어가는 문, 그리고 옆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 세 개가 다 잠겨 있었다. 마침 사무실 문이 열려있고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업무를 보고 계셨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잠겼어요. 세 문 다 열어 봤는데 안 열려요.”

“그 문들 말고 옆에 문이 또 하나 있는데 그 문이 열려 있어요.”

난 그 문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에 어리둥절했다.

“어떤 문을 말씀 하시는지?”

“내가 가서 가르쳐 드릴게요.”

사무실에 딸린 방에서 신부님이 나오셨다. 신부님이 거기 계셨을 줄이야. 빨간 머리에 피부가 유난히 하얀 젊은 ‘매튜’ 신부님은 할머니가 말하던 옆문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셨다. 그 문은 미사시간에 신부님과 복사들이 쓰는 방을 거쳐 성당 안으로 나 있는 문이었다. 신부님이 제대 앞 의자에 앉으셨다.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나는 신부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신부님, 저는 제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내가 겪는 무력감과 우울증에 대해 신부님께 하소연하는 와중에 눈물까지 터졌다. 나이는 어리지만 신부님이기에 의지하고 싶었다.

“당신은 하느님의 딸입니다!”

신부님의 짧은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나는 다시 그전의 나로 돌아왔다. 하느님의 딸이란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고 비틀거렸었다. 세속적으로 잘 났거나 못 났거나, 건강하거나 그렇지 못 하거나,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건 나는 ‘인간으로서 나’를 존경하며 살아야한다. ‘하느님의 딸’이란 말은 ‘인간으로서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말해준다. 하느님의 딸은 하느님을 닮아야한다. 하느님의 딸이 어찌 하느님의 속성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겠는가.

깨닫고 보니 나는 금수저를 능가하는 天수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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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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