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을 썩이지 않는 아이

by 랭크작가

어른들은 가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지만 내 자식은 참 잘 컸다.”
사춘기 한 번 크게 겪지 않았고, 말도 잘 들었고, 비뚤어지거나 사고를 치지도 않았고, 부모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도 없었다고. 그래서 아이에게 늘 고맙다고 말한다. “내 속 안 썩이고 잘 커줘서 고맙다”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이 조금 복잡해진다.
그 말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말 속에는 어쩌면 우리가 너무 쉽게 지나쳐버리는 어떤 현실이 숨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아이들을 미성숙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되어야 비로소 철이 들고 세상을 이해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성숙할 때가 있다.


아이들은 아직 세상의 계산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관계에서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받아주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부모가 힘들어 보이면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해도 조용히 눈치를 보고, 분위기를 읽고, 스스로 감정을 접어버리기도 한다. 아직 자신의 감정을 정교하게 설명할 언어는 없지만, 상황을 느끼는 감각은 생각보다 훨씬 섬세하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반항하지 않는다.
어떤 아이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어떤 아이들은 사춘기를 크게 겪지 않는다.


그것이 정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일까.

사춘기라는 것은 단순히 반항의 시기가 아니다.
부모의 세계에서 조금씩 떨어져 나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부모가 세워준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준을 만들어 보기 시작하는 시기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불편한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조금씩 시험해보는 시간이다.


그래서 그 과정에는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말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부모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사실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나는 누구인가.

만약 그 질문이 충분히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이는 반항을 배우지 못할 수도 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할 수도 있다. 부모에게 불편함을 말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믿게 될 수도 있다.


그럴 때 아이는 착한 아이가 된다.
부모 속을 썩이지 않는 아이가 된다.

하지만 그 착함은 때로는 참음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받지 못한 채 자란 사람들은 종종 성인이 된 후에야 그 질문을 다시 만나게 된다. 왜 나는 내 생각을 말하기 어려운가. 왜 나는 늘 다른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가. 왜 나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가.

어떤 질문들은 너무 늦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속을 썩이지 않고 잘 커준 아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슬퍼진다. 아이의 역할이 부모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되어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의 속을 썩이지 않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는 경험일지도 모른다. 부모를 실망시킬까 봐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말해도 괜찮다는 확신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건강한 관계란 서로에게 전혀 상처를 주지 않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드러나도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렇게 생각한다.

사춘기 없이 지나간 시간들이 정말 평온했던 것인지, 아니면 아이가 조용히 버티고 있었던 시간인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부모에게 가장 좋은 아이는 속을 썩이지 않는 아이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에게 가장 좋은 부모는 아마 이런 부모일 것이다.

네가 왜 그랬는지
나는 이제라도 알고 싶다고 말해주는 부모.

그 말 한마디가 어떤 사람에게는 늦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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