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상태 진단 | 전략 없이 성실하게만 굴러온 브랜드
현재 상태를 점검하는 일로 시작한다.
아래는 브랜딩에서 ‘현재 상태 점검’ 단계에서 하는 질문들이다.
정체성은 무엇으로 인식되고 있는가?
강점은 무엇이며, 왜 그것이 강점인가?
약점은 구조적 문제인가, 운영 문제인가?
리소스는 어디서 새고 있는가?
지금의 방식이 “지속 가능한가? / 지속할 필요가 있는가?”
이 질문을 이용해 진단해 보려고 한다.
이건 답을 잘 쓰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속이지 않기 위한 질문들이다.
질문들에 솔직하게 답해보는 것이, 지금 이 글의 목적이다.
적어도 회피하지는 않기로 했다.
먼저, 전 편에서 한 자가진단을 다시 꺼내본다.
남에게는 전략을 제안하면서, 내 인생의 전략이 전혀 없었다.
나를 설명하는 말들은 많지만, 정작 내가 고른 단어는 없었다.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연장선’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바꿔야 한다는 건 아는데, 뭘 바꿔야 할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늘 누군가가 세운 기준, 역할, 책임 안에서 살아온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살아왔을까.
자가진단한 내용에 이유를 붙여보자면,
누구나 알만한 회사에서 일해 오면서 내가 잘하고,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 이해시키고 합리화했는지도 모르겠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관성처럼 살아왔다.
불만이 크지 않았기에, 굳이 바꾸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관계에서 누군가가 나를 정의하는 단어를 말해주는 것을 듣고 반박하지 않고, 반문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나 동의를 했기보다는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무관심했던 것 같다.
스스로 질문하며 살지 않은 게 먼저인지,
누군가 준 기준, 역할, 책임에 순응하며 살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지금 진단에 이유를 살피고 이유를 찾는 중에도 확실한 답이 없다.
이렇게나 '나' 자신을 모름에 한탄하며 자신을 타박한다.
지금의 나는, 브랜드 관점에서 보면
'전략 하나 없이 성실하게 굴러가는 브랜드'에 가깝다. (용케 안 망했다)
자, 이제부터는 ‘과거의 선택들’을 밟아가 보겠다.
과거의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데, 나는 이걸 한 번도 분석해 본 적이 없다.
브랜딩은 진단, 심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위에서 자가 진단과 심사를 거쳤다.
그다음은 히스토리다. 지금의 나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나는 운동을 하다 뒤늦게 디자인으로 진로를 전환했고 짧은 시간 준비해, 대학에 수석 합격했다.
공부보다는 실제 경험을 우선했고, 일을 위해 출석을 등한시했다. 덕분에 경력과 역량은 빨리 쌓였다.
일을 하면서도 무슨 갈증인지 서브 프로젝트와 프리랜서를 병행했다.
추천으로 입사한 후 추천으로 이직했고, 좋은 회사에서 경력을 쌓았다. 많은 곳에서 찾고, 원했다. (분명 강점인데, 그 강점이 나를 지치게 만든 적도 있다. 그리고 늘 ‘괜찮은 사람’이어야 해서, 솔직해지기 어려웠다. 코스프레였다.)
지금은 퇴사 후 나의 일과, 브랜드를 만들어 운영 중이고, 자신감과 불안이 공존하는 중이다.
여기까지 보니 대체로 엄청난 시련이 없었다.
아니, 있었어도 대수롭지 않았다.
정했으니 어쩔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으니 정한 대로 그냥 했다.
그 덕에 전환이 빨랐고, 적응도 빨랐다.
맞다.
그냥 해대는 성격 탓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은 환경이 나를 밀어서 선택된 길도 많았다.
잘 살아온 것 같기도, 엉망으로 대충 살아온 것 같기도 한 묘한 상태다.
분명 열심히 살아왔는데, 내 안을 들여다보니 허전한 구멍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선택들을 브랜드의 히스토리 관점에서 보면,
나는 전환에 강하고, 환경 적응이 빠른 브랜드처럼 작동했다.
동시에, 방향을 스스로 정하지 않은 채 움직여 온 흔적도 뚜렷하다.
이제 현재 상태를 보겠다.
대입 이후, '일'로만 삶을 채웠다.
일로 쌓인 관계는 챙겨도, 나 자신을 챙기는 것은 외면했다.
일이 우선이니 '나'는 계속 뒷전이었다.
일이 잘 돌아가니 '내 삶'도, '나'도 잘 돌아간다는 것으로 치부했다.
일 = 나였다.
브랜드 진단 단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이 부분이었다.
매출은 발생하고 있었지만 그걸 지탱하는 구조와 방향은 명확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보이는 문제는,
능력 부족이라기보다,
감당 가능한 리소스의 경계를 이미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 가까웠다.
회사 운영에 무리가 없다고 해도
시스템이, 경영이, 재무가, 전략이 다 잘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데 말이다.
지금의 나는 회사도 운영도 제품도 각각 다 다른 근육임을 안다.
그리고 모든 근육을 균형 있게 키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외부의 시선은 성실하고 실력 좋은 사람이지만
다른 욕심과 역할이 많이 생긴 나는 지금 무지하고, 헤매고, 엉성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라 느낀다.
지금 나의 장점은 여러 영역을 거치며 케파가 넓어진 것,
스스로 사업과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직원/프리랜서 때보다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것이고,
약점은 직접 해야 하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시간과 리소스가 너무 빠진다는 점이다.
여기까지가
현재 상태 점검의 결과다.
지금의 나는
일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브랜드다.
열정과 역량은 충분했지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정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확장만 있었고,
정리는 없었다.
늘 단단해 보이려 했지만,
확장에만 익숙했고, 정리에는 서툰 사람이었다.
성공도 실패도 있었지만,
그 사이에서 ‘나’는 늘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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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다재다능’이라는 이름의 저주 | 보유 자산 평가 | 경험, 기술, 직함이라는 이름의 재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