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과 고양이와 체리파이

프롤로그

by Cindy in Wonderland

4월. 실업자가 되었다.


1단계 - 부정

오히려 덤덤했다.

종일 마음이 붕 떠서 꿈꾸는 기분이었다.

회사가 나를 다시 부를 거란 멍청한 상상을 하며,

첫날밤은 오히려 편하게 잠든 것 같기도 하다.


2단계 - 분노

분노로 휘갈겨 쓴 일기에 기억의 조각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친 신하처럼,

멋지게 말하면 내부고발, 솔직히 말하면 ‘이판사판’.

내가 느낀 부당함을 어떤 식으로든 알리고 싶었다.


인사부에 몇 번이고 이메일을 썼다 지웠다.

진심으로 방송국에 전화를 할까 고민했다.


3단계 - 타협

그 무렵, 노한동 작가의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을 읽기 시작했다.

에세이 위로 내 경험이 겹치며, 분노를 지나 어쩌면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저 말 잘 듣는 부하 직원을 원했던 그와 할 말은 꼭 하고 마는 나.

애초에 잘못된 만남이었다.

오래전부터 예고된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


4단계 - 우울

상사의 입장을 이해하려다 보니, 결국 나를 탓하게 됐다.

개인적으로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차라리 남을 탓하는 편이 내 정신 건강에는 나았을지도 모른다.


쉽게 잠에 들 수 없는 밤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마지막 단계 - 수용

우울이 깊어져 감정이 바싹 말라가던 어느 날,

곧 실업자가 될 내 처지를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이 말했다.

- 이제 당분간 일 때문에 스트레스 안 받아도 되겠네.

축하의 의미로 아침으로는 체리파이 어때?


그의 말 한마디에 나는 우울의 터널 끝에서 갑작스러운 햇살과 마주했다.


남편은 낮잠을 좋아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자신만의 속도가 확실한 사람이다.

나는 그런 남편을 ‘내가 입양한 첫 번째 고양이’라 부른다.


체리 파이를 두고 마주 앉은 고양이 하나.

테이블 아래, 귀를 팔랑이는 고양이 둘.

지금 생각해 보면 진정한 전환점은 해고 통보를 받은 순간이 아니라,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느낀 그날 아침이었을 것이다.


안데르센의 동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잘 구워진 설탕 반죽의 반짝거림.

켜켜이 쌓인 파이 크러스트 속 가득한 따뜻하고 끈적한, 붉디붉은 체리 필링.


체리파이는 인생을 닮았다.


겹겹이 쌓인 시간 속에

어떤 시고 끈적이는 것들을 담아,

누구와 함께,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구워낼 것인가?


IMG_5155.heic 햇살과 고양이와 체리파이


그날의 체리파이는,

처음에는 시었고 마지막에는 유달리 달았다.


그리고 그때의 나처럼

조금 덜 괜찮은 하루를 살고 있는 그대에게,

이 글이 한 조각의 위로가 되기를.


부정과 분노, 타협과 우울이 스쳐간 자리에

햇살고양이체리파이,

그리고 조금 더 괜찮아진 내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