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필요의 방’을 정리하기로 했다.
언제고 다시 그 문을 열었을 때
더는 달빛이 ‘필요하지 않은 것들’에 가려지지 않도록.
설상가상(雪上加霜): 눈 위에 서리가 겹쳐 내린다, 혹은 나쁜 일이 계속해서 겹쳐 일어난다.
아이폰이 갑자기 꺼졌다.
강제 재부팅, 충전, 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새 아이폰으로의 무료 업그레이드
지금 폰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유료 수리 (성공 확률 50%) - 실패하면 돈은 날리고, 데이터도 사라진다.
나는, 두려움과 함께 두 번째를 선택했다.
리노와 루나의 사진이 클라우드에 백업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리비용 50만 원과 매달 2만원의 애플 클라우드 요금을 남기고 아이폰은 부활했다.
디지털화가 되기 전의 세상 속 아빠의 필름 카메라를 떠올렸다.
담고 싶은 표정과 풍경을 고르고 골라, 셔터를 누르고
정성스레 하나하나 인화한 후에야 볼 수 있었던 느리고 단단했던 기록들.
그런가 하면 어릴 적, 플로피 디스크 하나의 용량은 720KB에 불과했다.
내가 습관처럼 찍는 리노의 사진 하나도 다 담기지 않는 용량이다.
나는 매일 수십 장의 사진을 찍는다.
발톱 깎다 삐진 리노, 버터를 훔치는 루나, 의미 없는 표지판, 혹은 예쁜 하늘.
그렇게 쌓인 수만 장의 디지털 앨범 속에서,
20년 뒤에도 꺼내볼 사진은 몇 장이나 될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스크린을 터치하며 사진을 남기고, 문서를 만들며 그 모든 것들을 보관한다.
클라우드는 '공간부족'이라는 이름으로 방치되고 파일을 삭제하는 대신 유료로 저장 공간을 늘린다.
물론 만질 수 없는 모니터 너머의 공간은 부피로 환산되지 않는다.
하지만 구글 검색 한 번에도 0.0003 kwh의 에너지가 소모되고
300mg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캘리포니아 어딘가의 데이터센터는
내가 지우지 않은 이메일 한 통, 정리하지 않은 구글 시트, 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한 장을 위해
전력을 쓰고, 탄소를 내뿜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구글 드라이브를 정리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열린 그 방은 말 그대로 ‘디지털 먼지’로 가득한 창고였다.
그중 유독 많이 쌓여 있던 건 매년 새해에 만들었던 ‘연간 목표’들이었다.
매년 1월이면 새해 목표를 정리했고 전혀 완료되지 못한 항목들조차 훈장처럼 남겨두었다.
그 파일들을 지우기 전 목표들을 천천히 되돌아보았다.
유독 눈길을 끄는, 매해 질리지도 않고 등장했던 것들.
커피 끊기
밀가루 끊기
프랑스어 마스터하기
치아 교정
그리고 충동적으로 가장 오래된 계획을 골라
파일을 모두 지우기 전 신성한 의식을 행하듯 실행에 옮겼다.
무서워서 20년을 미뤄왔던 치아 교정.
그 먼지가 뿌옇게 쌓인 서랍을, 나는 드디어 열었다.
내 작은 세상 속, 신성한 카파코차였다.
그렇게 난 나의 제단 위에서 디지털 먼지를 활활 태웠다.
생각보다 많이 아팠고, 꽤나 불편했다.
하지만 느리게 움직이는 치아처럼 나도 아주 조금씩, 기존의 나를 벗어나고 있었다.
교정은 결국 '정리'였다.
오래 방치한 틀어짐을 마주하고,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천천히, 바르게 되돌리는 일.
완벽하게 준비되어야만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정도면 됐다'는 어설픈 용기가 '언젠가'를 '지금'으로 만드는 유일한 연료라는 걸 배운 나는
어색한 교정기를 끼고 마치 챗셔캣처럼 웃는다.
왠지 모를 성취감으로 난 꽤 오래 행복했다.
하지만 목표를 다 이루는 것은 퍽 쉽지가 않아서,
아직도 매일 아침, 모닝커피와 크루아상이 나를 잠에서 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