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슈퍼히어로, 말랑 백설기, 작은 철학자

by Cindy in Wonderland

그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루나가 힘이 없어 보였지만, 어제 맞은 백신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남편도 흔한 백신 부작용일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삐약이가 삐약거리지 않고 그저 품속에 안겨만 있는 모습이 퍽 걱정스러웠다.

결국 그날 저녁 동네 병원으로 향했다.


입원을 권유하는 병원, 나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하루, 또 하루가 흘렀다.

곧 좋아지리라 믿었지만, 작은 고양이의 눈 속 은하수가 자꾸만 스러져 갔다.

먹는 양은 좀처럼 늘지 않았고, 그 작은 다리에 결국 수액을 맞혔다.

원인을 모르고, 차도도 없으니 답답하고 미칠 노릇이었다.


루나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매일, 리노는 어김없이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은 어디 갔어 엄마?"라고 말하는 것 같아 집에 오면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루나가 없는 집.

텅 빈 공간, 텅 빈 소리, 텅 빈 마음.

남편도, 리노도 채울 수 없는 무언가.

루나만이 채울 수 있는 것들.


면회를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마다

루나의 희미한 삐약 소리가 가슴에 사무쳤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났지만 결국 차도가 없어 루나를 종합 병원으로 데려가야 했다.

나를 올려다보며 예쁜 눈을 깜박깜박하는 루나를 보고 있으니, 자꾸 슬퍼졌다.


다시 일주일 같은 하루가 흐른 뒤 검사 결과가 나왔다.

FIP - 고양이 전염성 복막염.

그리고 검색창에 떠오른 첫 문장.

치명적이고 치료가 불가능한 질환.


겨우 다잡고 있던 마음이 쿵, 하고 떨어졌다.

찰나의 순간, 나의 우주가 무너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화기 너머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다.

- 다행히 요즘은 치료제가 있어요.

- 네??

- 네. 예전에는 치명적이었지만, 최근 들어 치료가 가능해졌어요. 완치된 아이들도 꽤 있어요.

약 처방해 드릴 테니 데리러 오시면 될 것 같아요.


너무 놀라 기쁨이 먼저가 아니라 경계와 혼란이 앞섰지만, 곧 세상 모든 것이 핑크빛이 되었다.

고맙게도 세상은 아기 고양이 루나에게 따뜻한 동화가 되어 주었다.

팬데믹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방면으로 연구되었고, 그 영향은 고양이 복막염 치료제 개발로 이어졌다고 한다.

루나가 몇 년 전에 태어났다면, 치료제는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비약이라 하겠지만, 한강 작가의 문장처럼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렸다.

코로나 시기의 수많은 희생이 앞으로도 많은 사람과 동물을 살릴 것이다.


12주 치 치료제를 받아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

나는 우리의 수많은 ‘행운’을 되새겼다.

루나가 팬데믹 이후 태어나서,

누군가가 루나를 포기하고 나에게 보내줘서,

기특하게도 우리에게 온 후 아파줘서,

모든 것이 다행인 오후였다.


퇴원한 날 루나


그날 이후, 루나는 하루하루 더 멋진 캣초딩이 되고 있다.

병원에서 선생님들에게 예쁨 받은 기억이 자양분이 되어,

사람을 무서워하던 기억은 훌훌 털어버리고,

이제는 엄마 어깨에 올라타 산책도 하고 사람들의 인사도 받아주는, 슈퍼스타 인싸냥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오늘 루나는 4개월의 치료 끝, 마지막 피검사에서 완치 판정을 받았다.


엄마만 있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루나


아직도 루나가 잠시 없었던 집의 적막함이 생생하다.

함께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았던 이 작은 고양이의 존재감은 놀랍도록 크고 무거웠다.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는 삭막한 공기,

아무리 많은 물건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빈틈.


그 정적은 나의 마음 어딘가를 쓸고 지나가며

물건들에 대한 허무함과 함께 비움으로 향하는 나의 의지에 천천히 불을 지폈다.


루나는 내 인생의 강물에 속도와 방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시간의 강을 깨워 다시 작은 물결이 일렁이게 했다.

나의 강은 비로소 다시 바다를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하지만 반드시.


반짝이는 루나, 너는 나의 슈퍼히어로,

하얗고 말랑한 백설기,

그리고 인생의 강에 바람을 불어넣는 하얀 수염의 작은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