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와 사위의 다이나믹

자식 이기는 부모 있긔 없긔?

by 별빛햇살

엄마와 남편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했지만 꾸준히 발전했다.


남편과 나에게는 장거리 연애 기간이 있었다. 그 당시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는 '남사친'으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정황상 미심쩍었고, 엄마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셨다.


"아니, 도대체 캐나다 남자애가 여기를 왜 오는데! 한국을 왜 오냐고! 사귀면 가만 안 둘 줄 알아라!"


그때의 한국 방문은 잠깐이었기에 (엄마 생각에)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남편은 캐나다에서 대학교를 마친 후 한국으로 곧장 다시 돌아왔고, 그가 '남친'임을 밝히자 집안은 뒤집어졌다.


엄마는 '넘사스럽다', '동네 창피하다' 등의 이유를 대셨다. 나는 그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국제결혼하면 네가 힘들어질 거다', '캐나다로 떠나면 보고 싶어서 안된다' 같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반대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래서 나는 더 강경했는지도 모른다. 남들 눈치 때문에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나를 그렇게 아껴주는 사람도 없는데 이럴 때만 '감 놔라 배 놔라' 나를 위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런 사람들을 떠나 멀리멀리 가버리고 싶었다.


그가 남자친구로서 다시 엄마를 뵈었던 날, 우리는 단단히 계획을 짰다.


"엄마를 보자마자 큰절을 해야 해." 그는 큰절을 연습했다.


그때 엄마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계셨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엄마는 사무실 문 앞에 서 계셨다.


나는 시켰다. "지금 절 해."

그는 사람 많은 대로변에서 넙죽 큰절을 했다.


"아이고, 야가 와 이라노? 일어나라."


나는 보았다. 2초간 스치고 지나간 미소를. 황당하고 우스워서 엄마는 살짝 웃으셨다.

하지만 순식간에 계획대로 '정색 모드'로 돌변하셨다.


엄마는 냉랭한 얼굴로 말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도 이불과 냄비, 전기밥솥, 그릇 같은 것들을 가져다주셨다.

한국인의 '정', 초코파이 CM송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가 떠올랐다. 나는 엄마의 행동이 조금 아리송했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당시 그는 사윗감으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돈 없고, 직장 없고, 계획 없고, 말 안 통하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게다가 당시 사람들은 국제결혼을 굉장히 안 좋게 보았다. 둘이 길을 걸어가기만 해도 고개를 돌려가며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한국에 외국인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대구는 더 심했다.


그는 엄마에게서 꾸준히 눈총을 받았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엄마가 막말을 하신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남편은 대체로 무덤덤했다. 그는 감정에 기복이 별로 없다.


'이 사람은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없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왠지 감옥살이를 잘할 것도 같다. 아주 좋게 말하면, 성인군자 또는 해탈을 한 사람 같기도 하다.


하지만 20여 년을 함께 하며 내린 결론 - '그는 그냥 로봇이다.'

그는 필요한 생각만 효율적으로 한다. 근심걱정도 없다. 근심걱정은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 가치가 있다.


어쨌든 그는 엄마에게 홀대를 받으면서도 예의 바르고 착실하게 행동했다. 엄마의 사무실에 힘쓸 일이 있으면 곧바로 달려가서 도왔다.


얼마 후 내가 먼저 취직을 하고, 그도 곧 취직을 해서 우리 둘은 경기도로 옮겨갔다.


어느 날 엄마가 말씀하셨다. "나는 걔의 캐나다 국적이 싫다고. 다른 건 다 됐고, 한국인이 아닌 게 싫다고!"


나는 그 말에 한 편으로 안도했다. 국적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다른 것들은 다 허락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 친구와 전화통화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내 방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래... 내가 괜히 끝까지 반대했다가 나를 평생 원망하면 우짜겠노... 지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해야재..."


나는 내 방에서 쾌재를 불렀다.


물론 그 후에도 판을 뒤집어보려는 엄마의 노력은 꾸준히 있었다. 나는 술을 마시며 저항하기도, 두들겨 맞기도, 온갖 욕을 다 들어보기도 했다. 결혼식 직전에도 결혼식 직후에도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꺾이지 않았다.


남편은 한국에서 7년을 살았다. 한국에서 우리는 일을 했고, 결혼을 했고, 아이 둘을 낳았다. 그리고 약 15년 전, 2010년에 캐나다로 건너왔다.


이제 엄마는 사위를 좋아하신다. 내 남편은 '엄친사', 엄마친구사위이다. 사위자랑을 즐기신다.

지금까지 엄마는 캐나다에도 열 번쯤 오셨다. 둘은 아주 잘 지낸다.


"엄마, 엄마 세대에 캐나다 매년 여행하는 사람 잘 없잖아. 사위 덕분인 거 알재?"

"그렇지. 맞지."


알츠하이머 초기인 장모님과 일 년에 몇 개월씩을 불평 없이 함께 사는 사위.

역시 보통이 아니다. 로봇이 확실하다. 참 든든하다.

홀대받은 기억은 삭제한 것 같다. 가치 없는 기억은 바로바로 삭제한다.


가끔 엄마와 나는 유튜브를 보면서 놀고 있는데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가 있다.


"근데 니는 하는 게 뭐꼬? 니 남편이 다 하네." 엄마가 사위 편을 든다.

"내가 밥 했잖아. 나도 많이 한다고. 나도 좀 쉬자." 나는 항변한다.


엄마가 캐나다를 떠나는 날이면 그는 말한다.

"장모님, 또 오세요. 언제나 환영해요."


그리고 떠나는 장모님을 안아드린다.

"어이쿠. 이건 캐나다식인가. 허허."


딸을 안아준 적 없는 엄마가 사위를 안고 어깨를 토닥인다.


나는 가끔 나보다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은 엄마가 애잔하다.

이렇게 사는 딸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혹시 스스로가 안쓰러울까. 혹시 딸이 부러울까.


'엄마, 부러우면 지는 거야.'


나는 이미 이겼다.

좋은 사위를 얻은 엄마도 이겼다.


WIN-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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