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초월 시댁식구
나의 시부모님은 독특한 삶을 사셨다. 두 분은 모두 '가출청소년'이셨다.
시아버지는 캐나다에서 태어나셨고, 시어머니는 남미에서 태어나셨다. 그들은 각자의 나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출가'를 하셨다. 부모님들께 허락을 받았기에 '출가'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시아버지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셨고, 시어머니의 아버지는 회계사셨다. 두 집안 모두 나름 상류층이었기에 시부모님의 행보는 가히 파격적이었다. 두 분은 나중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으셨다.
1970년대 중반, 고등학교를 자퇴한 시아버지는 세계를 경험하고자 캐나다에서 남미까지 여행을 하셨다. 주로 히치하이킹과 선박 등으로 이동하시며 약 2년 간을 방랑하셨다. 남미에서 시어머니를 만나셨을 때, 두 분은 모두 스무 살 무렵의 히피(Hippie)셨다.
"나는 첫눈에 알아봤어. 이 남자와 결혼하겠구나."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두 분은 첫째 아들(남편의 형)을 남미에서 여행 중 낳으셨다. 그리고 캐나다에 가기로 결심하셨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 남미에서 캐나다 BC주 북부 시아버지의 고향까지 이동하셨다.
두 분은 원래 몇 년 후 다른 곳으로 다시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으셨다. 하지만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둘째(남편)를 가졌고, 3년 뒤에는 셋째까지 낳으면서 캐나다에 그대로 정착하게 되셨다.
지금은 두 분이 헤어지셨지만 그분들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남편이 나를 쫓아 한국에 간 것은 그분들 기준에선 피식 웃을만한 '동네마실' 수준이 아니었을까.
두 분은 자유, 평화, YOLO (You only live once. 인생은 한 번뿐) 그 자체인 삶을 사셨다. 그래서인지 자식에게 기대도 요구도 간섭도 없다. 각자 행복하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시다. 우리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에도 두 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셨다. 단지 축하한다며 기뻐하셨을 뿐이다.
시어머니는 매우 사교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시다. 나는 시어머니에게서 '무조건적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자식들에게 건네는 눈빛과 미소와 태도에는 진심 어린 애정이 담겨있다. 어릴 때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라며 교과서를 통해 배웠다면, 결혼 후 나는 그 개념을 시어머니를 통해 체험하며 배웠다.
시어머니는 자식들에게뿐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누구에게나 진심의 손길을 건네신다. 형제자매들의 간병을 자처해 고국으로 돌아가 많이 도우셨고,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하신다.
시어머니는 나를 평가하지도 지적하지도 않으신다. 나는 시어머니 앞에서 일상의 모습 그대로 행동한다. 평소대로 찌개 하나, 반찬 서너 개를 올린 소박한 밥상을 대접할 때에도 한국음식을 잘 드시는 시어머니는 아주 고마워하신다. 떠나시는 길에 내가 직접 담근 김치를 조금 싸드리면 참 좋아하신다. 나도 덩달아 뿌듯해진다.
시어머니는 지난가을 '산티아고 순례길 (El Camino de Santiago)' 800km를 5주간 걷고 오셨다. 떠나기 전 매일 수십 km를 걸으며 일 년 정도 연습하셨다. 준비가 부족했던 많은 사람들이 중도에 포기하는 것을 보셨지만, 시어머니는 70세의 나이에 홀로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수년간 원하셨던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루어내셨다.
남편의 가족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추구하는 삶이 다르고, 성공의 개념이 다르고, 인생의 가치관이 다르다. 우리가 서로의 사는 방식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굳이 완벽하게 이해할 필요도, 굳이 뭔가를 바꾸려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서로를 온전한 독립체로 여기기에 서로의 '다름'을 개의치 않는다.
나는 한국인과 다른 사고를 가진 그들이 좋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그들이 편하다. 삶을 오롯이 즐길 줄 아는 그들이 부럽다.
나는 이미 그들에게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