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힘들 때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나 결혼 잘했다', '나 행복하다'는 말들을 주로 늘어놓았다. 틀린 말은 없었다. 단, 단점을 쏙 빼놓았다.
시댁식구들은 보편적인 한국인들과는 천지차이의 삶을 살아오셨다. 그들의 생활방식이 틀리진 않았으나, 나와는 많이 달랐다. 그래서 나는 그런 차이들이 버거울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시댁식구들은 우리 집에 자주 오래 머무셨다. 시부모님의 방문이 가장 빈번했고, 다른 손님들도 종종 오셨다. 캐나다는 워낙 큰 나라이고 다들 멀리 살다 보니, 한번 올 때면 오래 머무셨다. 우리는 몇 주에 한 번씩, 또는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손님을 치렀고, 이것은 점차 나의 몸과 마음에 무리를 주었다.
우리 부부가 맞벌이를 하고, 아이들이 9살, 6살쯤이었을 때 가장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시아버지와 새 아내분이 우리 집에서 2주를 머문 후, 시어머니와 친구분이 바로 다음 날부터 2주를 머무시는 일정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와 사이가 좋았기에 관계에 의한 갈등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워킹맘으로 일, 육아, 집안일에 찌들어 있었고, 프로젝트 마감까지 겹쳐 야근이 잦았다. 나의 건강은 수년 전부터 눈에 띄게 저하되었는데, 힘든 상황에 손님들까지 맞으려니 체력과 정신력은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까다로운 분들은 아니셨지만, 기본적으로 식사, 잠자리, 청소 등에 평소보다 신경을 써야 했다. 생활습관과 방식도 많이 다르다 보니 불편한 점들도 하나둘 눈에 띄었다. 게다가 집안이 항상 북적이다 보니 우리의 개인생활, 휴식, 수면, 아이들 숙제시간까지도 영향을 받았다. 우리의 리듬과 환경은 흐트러졌다.
손님들은 무사히 치렀지만, 나는 그즈음 몸이 많이 아팠다. 특정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그제껏 누적된 건강상 문제점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병원검사결과가 좋지 않았고, 가족 담당의는 여러 전문의를 연결해 주었다. 느린 캐나다 의료시스템 탓에 각 의사마다 몇 달을 기다려 만났지만 그들은 정확한 병명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참다못해 한국에 가서 진단을 받았고 면역 관련 질병이라는 것을 알고 돌아왔다. 그 이후에도 대상포진, 각종 감염, 호르몬 불균형 등의 상태가 물밀듯 찾아왔다. 아주 심각한 병들은 아니었기에 서서히 회복되었다.
건강악화의 원천적 이유는 일과 육아 등에 의한 에너지 고갈이었지만, 잦은 손님맞이도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에 한몫을 했다고 본다. 나는 그들이 싫진 않았지만 해내야 하는 일들이 힘에 부쳤다. 남편도 나만큼 집안일을 열심히 했고 손님들도 거들긴 했지만, 집안에 사람수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피곤함이 가중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 남편은 내 건강문제와 시댁식구를 연관 짓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하지만 나의 꾸준한 주입식 교육에 의해 서서히 설득을 당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남편은 손님맞이 집청소, 침구정리, 음식준비까지 모든 걸 도맡으며, 손님과 관련해서는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도록 하려 애썼다. 손님이 올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는 나를 알기에 남편은 스스로 모든 걸 처리하면서 문제해결을 도모했다. 나는 그가 하는 것이 항상 미덥진 않았지만 생존을 위해 완벽주의를 내려놓았다.
시댁식구들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를 것이다. 나는 그들 앞에서 함께 웃고 성의껏 대접하는 속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피곤함에 넋이 나간듯한 나의 표정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분들은 젊은 시절을 자유롭게 방랑하셨고, 평생을 친척이나 친구들과 허물없이 왕래하셨다. 그래서인지 이런 생활을 당연하게 생각하셨고, 누구의 집에서나 편안해 보이셨다. 자주 방문하는 것이 '예의'이자 '미덕'이라고까지 여기시는 듯했다.
남편도 나와 시댁 사이에 끼어서 모두를 맞추느라 지치기 시작했다. 남편은 누가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으면 내 눈치를 보았다. 말을 전할 때 뜸을 들이기도 했다. 나는 남편도 불쌍했고 나도 불쌍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오는 손님을 막진 않았지만, 굳이 일부러 초대하지도 않았다. 나는 또 병이 날까 봐 몸을 사렸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아프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졌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손님이 안 와서 좀 좋았다.
요즘은 가끔 오신다. 우리가 캐나다로 돌아온 후 한동안은 오랜만에 우리 부부와 어린 손주들을 보려고 더 자주 오셨던 것 같다. 지금은 방문빈도가 줄었고, 근처의 시누이집에서 머무시는 때가 많아져서 나는 꽤 편해졌다.
이제는 우리 집에서 지내셔도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아이들도 자랐고 나도 일을 많이 줄여서 손님맞이가 덜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많이 내려놓았기에 크게 애쓰기보다는 힘들지 않은 선에서 편하게 대접한다. 우리가 캐나다에 온 지도 15년, 내가 '내려놓기'를 실행한 지도 15년이다. 이제는 내려놓을 것도 없다. 모든 기준이 바닥에 깔려있다.
요즘엔 내가 나서서 초대를 하기도 한다. 친정엄마가 병환으로 최근 자주 오래 우리 집에 머무시다 보니, 상대적으로 시댁식구들이 덜 오시는 게 좀 미안하기 때문이다. 친정식구가 오든 시댁식구가 오든 아무 불만 없고 물 흐르듯 다 괜찮다는 남편이라 다행이다. 나는 이제 찍소리도 안 한다.
위의 에피소드는 '빙산의 일각'이다. 나는 많은 면에서 시댁식구들과 정반대이고, 심지어 남편과도 매우 다르다. 단, 남편은 한국에 7년 동안 살면서 우리 쪽 문화와 성향이 스며들어 살짝 균형이 갖춰져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댁과 나는 충돌한 적이 없다. 나는 여전히 그들을 좋아하고 존중한다. 그 이유는 내가 사람을 볼 때 가장 중요히 생각하는 '선한 마음'을 그들이 지니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은 선하고, 악의가 없고, 다정하고, 온화하다. 나는 심지어 그들이 욕설을 하거나 언성을 높이는 모습조차 한 번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힘들었던 적은 있어도 그들을 미워했던 적은 없다.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선한 마음'을 알기에 나는 다른 부수적인 차이점들은 기꺼이 포용하려 한다. 인간관계에서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기에 나는 이 '선함'의 결이 맞는 사람이라면 많은 걸 덮어줄 수 있다. 어지간한 단점, 실수, 라이프스타일 등의 차이는 눈감아줄 수 있다. 그들도 분명 나의 부족한 무언가를 그들의 선한 마음으로 포용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연말연시도 시댁식구들과 함께 보냈다. 이제는 손님을 치른다는 의무감보다는 가족이 놀러 온다는 편안함이 있다. 나는 몸도 마음도 여유로워졌다. 이제는 그들이 친정식구들만큼 편하다.
언젠가는 가족들이 북적대던 시간들이 많이 그리울 것이다. 언젠가는 흐르는 세월 속에 가족들을 잃는 날도 맞을 것이다. 그런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기에, 이제는 한순간 한순간 후회 없이 가족들을 아끼고 보듬고 챙기며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