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통장, 꽉 찬 마음
“자기 그때 가난했던 거 맞지?”
“가난? 경제적으론 그랬지만 마음은 항상 풍요로웠는데?"
남편이 대답한다. 빵끗 웃으면서. 그런 사람이다. 남편도 시댁도.
캐나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대학생이었다. 장학금과 학자금 대출,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부모님께는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았다.
당시 그는 매우 마른 체형이었다. '혹시 굶주렸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팔뚝이 보통 여자보다 가늘었다. 그는 식탐도 없었다. 그에게 음식이란 생명유지수단일 뿐이었다. 결혼하고 살이 붙긴 했다.
대학교 졸업 후 빈곤했던 그는 빈곤한 상태로 한국에 들어왔다. 우선은 서울에서 한국어 어학당을 다녔다. 그의 첫 번째 집은 번화가에 위치한 숙식제공 고시원 같은 곳이었다. 가격은 저렴했지만 작은 침대와 책상 외에는 발 디딜 곳도 없는 협소한 방에 살았다. 공용 화장실과 욕실을 이용했고, 건물의 위층은 노래방, 아래층은 보드게임방으로 밤새도록 시끄러웠다.
내 생일날, 그는 선물을 준비했다. 종이를 오리고 접어서 만든 분홍색 꽃이었다. 물그릇에 꽃을 띄우니 종이꽃잎들이 연꽃처럼 펼쳐졌다. 꽃잎 한 장 한 장에는 소소한 약속들이 손글씨로 꾹꾹 담겨있었다. 노래 불러주기, 손 마사지 해주기 같은 것들이었다. 꽃잎을 한 장씩 떼어 쿠폰으로 쓰는 용도였다.
“사실 돈이 없어서 이렇게 했어. 다음엔 선물 사줄게.” 그가 말했다.
이 종이꽃은 아직까지도 가장 사랑스러웠던 선물로 기억된다. 내 나이 22살,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얼마 후 우리는 순차적으로 경기도에 취직을 했다. 남편의 경기도 첫 번째 집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옥탑방이었다. 오래된 주택가의 낡은 건물 옥상이었다. 그래도 정기적인 월급이 서서히 여유를 주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째서인지 결혼 한참 전부터 돈을 같이 모아서 같이 썼다. 어느 날 나는 캐나다 학자금 대출 이자가 아주 비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같이 모은 돈으로 남편의 학자금을 다 갚자고 제안했다. 헤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은행이자가 아까웠다. 학자금을 다 갚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당시 나는 소위 '신의 직장'이라던 곳을 다녔다. 연봉도 직원복지도 내가 좀 더 좋았다. 한국 기준으로 남편은 크게 내세울 것이 없었다. 시댁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의 잠재력에 뚜렷한 확신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순수했고 그런 모습이 예뻤다. 가끔 너무 무모했었나 싶기는 하다.
내가 25살, 남편이 27살 때, 우리는 결혼을 했다. 국제결혼이다 보니 양가 집안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건 전혀 없었다. 우리 둘이서 모든 준비를 했고 모든 비용을 처리했다. 나의 직장에서 제공한 직원대출혜택을 이용해 아파트 전세를 구했다. 혼수라고 할 것도 없었다. 가구점에 가서 '제일 싼 거 주세요.' 했다.
결혼반지는 18K 금반지에 결혼식을 올린 5월의 보석, 에메랄드를 넣어서 함께 맞췄다. 에메랄드는 참 저렴했다. 한 알에 2만 원이었다. 4월에 결혼했으면 다이아몬드인데 아니어서 다행이라며 같이 웃었다. 반지 두 개에 몇 십만 원 정도였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보통은 남자들이 프로포즈를 하면서 반지를 주는 것 아닌지 나는 궁금하다. 그렇다. 나는 프로포즈도 못 받았다. 가끔 아이들이 프로포즈를 안 했던 아빠를 타박하면 나는 통쾌하다. 사실 나는 프로포즈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어느 날 내가 '우리 언제 결혼할까?' 물었고 시간이 흐르자 나는 이미 유부녀였다. 우리에게 결혼은 그저 당연한 순서였다.
결혼식은 보편적인 수준으로 남들처럼 무난하게 했다. 결혼 전 웨딩앨범은 생략하고 결혼식에서만 촬영했다. 예식장, 드레스, 턱시도, 폐백, 메이크업 등도 한 번에 결정했다. 속단한 것치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었다.
한국 결혼식 후 곧바로 캐나다에 가서 친척과 친구들을 초대한 파티를 열었다. 캐나다 파티가 신혼여행을 대체했다. 그러고 보니 신혼여행도 제대로 못 갔다. 씁쓸하다. 그 후에 여행은 많이 다녀서 만회를 했다.
한국에서 결혼 후 맞벌이를 하며 아이 둘 낳고 살다가 캐나다로 이주했다. 캐나다에서는 방 2개짜리 작은 아파트 월세로 시작했다. 나는 대학원을 다녔고 남편은 직장을 다녔다. 학업을 마친 후 맞벌이를 했고 경제적으로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몇 번 이사를 하며 마음에 드는 집도 마련했다.
남편은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역전승을 했다. 운동경기도 홈그라운드에서 승률이 높다더니, 남편도 자기 나라에서 커리어를 더 잘 쌓았다. 가끔 '이 사람이 내 복을 다 가져간 거 아냐?' 싶다가도, 뒤집어서 '남편이 잘하니 나야말로 복 받았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초고소득자는 아니다. 큰 욕심 없는 우리에게 '이만하면 딱 좋다.' 싶은 정도이다.
우리는 여전히 검소한 편이다. 주변 사람들이 럭셔리 차를 타거나 말거나 소형차가 편하고 좋다. 우리는 백화점보다는 아웃렛에서 옷을 사고, 명품을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평생 안 사겠다는 약속은 못 하겠지만, 딱히 갖고 싶었던 적은 없다. 그래도 필요하거나 하고 싶은 것에는 쓸 만큼 쓰면서 산다.
우리가 돈에 대한 불평이나 다툼 없이 살아올 수 있었던 건 '돈에 대한 관점'과 '소비성향'이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는 물욕도 소유욕도 없는 편이다. 우리는 늘 충분하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우리는 항상 한 걸음 물러서서 돈을 바라봤던 것 같다. 돈을 따라가려 애쓴 적은 없지만, 돈은 적당히 따라와 주었다. 삶을 돌이켜보면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남편은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다. 돈이 없다고 주눅 들지도, 돈이 있다고 거만하지도 않다.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물질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항상 평온하고 풍요롭다.
나는 그를 '마음 부자'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