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질 것 같다가도 무너지는 날들
그렇게 약에 취한 채, 자신감 없는 상태로 복학을 했다.
첫 학기는 참 외로웠다.
함께 웃고 떠들던 여자 동기들은 어학연수로 떠났고,
남자 동기들은 군대에 있었다.
학교에 남은 몇몇 친구들은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엄마가 지어낸 설명이었다.
조울증이라는 말을 대신할, 엄마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여전히 약을 많이 먹던 시절이라 낮에도 졸음이 쏟아졌다.
전공 수업의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고,
이해하려 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너무 졸릴 때면 학교 가는 척하고 집을 나서
언니의 신혼집에 가서 낮잠을 자곤 했다.
그곳에는 신생아 조카가 있었다.
나는 그 아이 옆에 누워, 세상모르게 잠들곤 했다.
가족의 연이은 시련
내 입원으로 이미 지쳐 있던 가족에게
또 하나의 큰일이 닥쳤다.
언니가 혼전임신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스물여섯, 한창 꿈이 많을 나이에 부모님의 반대가 거셌다.
하지만 언니는 아이를 지우지 않겠다고 했다.
“허락하지 않으면 연을 끊겠다.”
그 말에 결국 부모님은 결혼을 허락하셨다.
내가 퇴원하기 직전,
잠시 외출 허가를 받아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하얀 드레스 속 언니는 눈물이 그렁했고,
나는 그 옆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헤맸다.
그런데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조카는 생후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감기에 걸려 응급실에 갔지만,
그곳에서 감염된 병으로 숨을 거뒀다.
그해, 우리 가족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모두 무너졌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달아 잃어가는 기분이었다.
학교로 돌아왔지만
그 모든 일들이 지나간 뒤,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공부는 여전히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학사경고를 받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펑펑 울었다.
“이제 그만둘래. 나랑 공대는 안 맞아.”
그 말엔 포기와 자기혐오가 뒤섞여 있었다.
그때 나를 붙잡아준 건 첫째 이모였다.
이모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만 다녔지만
학교에 다니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던 사람이다.
이모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꼴찌면 어때? 아무도 몰라.
대학은 공부하러 가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가는 곳이야. 놀면서 다녀봐.”
그 말이 나를 살렸다.
만약 그때 이모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자퇴했을 것이다.
평범하다는 목표
조울증은 흔히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발병한다.
그 때문에 학업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나는 낮은 학점이지만
결국 졸업까지 해냈다.
그건 내게 ‘평범한 인생’이라는 커다란 목표를 이룬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평범은 당연한 것이지만,
나에게는 싸워서 얻은 값진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