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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Apr 16. 2024

먹는 게 이토록 즐거울 줄이야

"엇, 저기 수호샘이랑 닮은 거 있다~"

동료인 현수는 스탠드 옷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타격감이 있기로 유명한 나는 어떤 포인트에서 사람들이 즐거워하는지 제법 아는 편이다. 서른 일곱 답지 않게, 입을 삐쭉 내미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하하, 닮긴 닮았네요.."

하지만, 닮았다는 말만으로 느낀 바를 온전히 전달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양팔을 하늘 위로 들어 올린 모습을 빼다박았기 때문이었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 얇은 허리와 홀쭉한 얼굴. 잘 먹고 다니라던 주변 사람들의 충고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날씬한 체형을 유지하기 위해 신경 쓰기 시작한 지 17년이 되었다. 이전까지는 밥 공기 정도는 거뜬히 먹고, 아이스크림을 입에 달고 살며 통통한 체형을 유지했다. 사람들에게 관심받고 싶은 욕구가 컸던 스무 살부터 먹는 양을 줄이고,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만에 20kg을 뺐다. 하루 끼씩 먹으며 매일 시간 넘게 걸었던 까닭이다. 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음식량을 조절하면 살은 어느 정도 자연스레 빠진다. 그러나, 균형적이지 않은 식사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영양실조로 보이는데요..."

어딘지 모르게 착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의사는 말했다.

"예에,,,?"

이마에서 느껴지던 잦은 열감으로 피검사를 받았던 나는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21세기 남한에서 있기 어려운 일이...."

의사는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하는 게 중요하다며, 잇기 어려워하던 말을 마무리했다.


나는 60kg 초반대의 체중을 건강하게 유지해오지 않았다. 무리하는 중이었다. 어떤 활동을 하든 체력적인 문제가 뒤따랐다. 피로한 느낌이 일반적인 상태로 여겨졌다. 밤이 되면 지쳐서 잠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심할 때는 무리한 일이 없었어도 낮잠을 자야만 했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따랐다. 에너지가 떨어진 상태에서는 인내하며 한 가지 활동에 몰입하는 것이 어려웠다. 


우리 내면에서는 마음이라고 일컬어지는 감정이 수시로 일어난다. 컨디션이 좋지 못하면 신체는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의 영향에 고스란히 노출되기 마련이다. 이를 테면, 컨디션이 좋을 때는 제각각의 감정이 송출하는 생각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더라도 하던 활동에 집중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반대의 상태라면 바다의 물결처럼 이는 생각들에 끊임없이 노출되며, 하던 활동도 잊고 감정의 양상에 빠져들게 된다.  

물론, 컨디션의 좋고 나쁨만으로 감정의 영향을 더 받고, 덜 받고를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체력이 늘 부족하던 나는 대부분의 순간에 컨디션이 좋지 못했고, 에너지가 금세 소진되고 집중하는 시간이 현저히 짧던 당시 상태를 살뜰히 알아주기보다는 비난하는 형태로 상황을 경험했다. 자기 비난은 기어이 자신을 향한 혐오로 이어졌고, 이때부터는 해야 하는 활동 자체가 그다지 중요해지지 않았다.


돌아보면, 나는 자기 관리라는 명목으로 스스로를 학대해 왔다. 허기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포만감이 주는 편안함을 잘 알기에, 음식의 맛을 충분히 느끼고 있기에 더 먹고 싶은 욕구가 샘솟을 때도 많았다. 그러나, 보이는 나를 크게 의식하였으므로,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고 못나 보이는 내가 남들에게 내세울 것이라고는 여전히 잘 해내고 있는 음식 조절이라고 생각했다.


강릉으로 오며 사회적 단절만큼 염려했던 것이 식사였다. 단기 임대로 숙소를 예약했으므로 밥을 지어먹을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음식을 해 먹는 것이 아무래도 맞았다. 외식으로 끼니를 모두 때우기에는 지출이 크고, 인스턴트 음식을 계속 사다 먹기에는 건강이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다를 보며 오후를 보낸 지 5일째 되는 날까지, 한 끼도 직접 차려먹은 적이 없다. 아침은 대부분 빵으로 해결했다. 특히, 초코파이를 많이 먹었다. 육군훈련소를 졸업하며 초코파이를 연달아 먹어본 적 없었는데. 상담센터를 퇴사하던 날에 근로 장학생으로 근무했던 혜지샘이 준 초코파이를 먹고 눈을 다시 뜨게 되었다. 어제부로 두 번째 박스를 뜯었으니, 적어도 강릉에서는 주식으로 간주할 수 있을 듯싶다.


점심과 저녁은 어중간하게 먹었다. 점심 겸 저녁으로 밥을 먹고 밤늦게 빵을 먹거나, 점심이나 저녁 중에 한 끼를 인스턴트식품으로 먹고 나머지 한 끼를 외식을 하는 식이었다. 다만, 혼자서 생활하다 보니 외식할 수 있는 메뉴는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영진해변 주변에는 식당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한정적이라는 현실을 실감했고, 먹던 음식들도 점차 물리기 시작했다.


'에이.. 지겨운데.. 그냥 대충 먹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실제로 빵으로만 하루 식사를 때우는 날이 생기기도 했다. 아침으로 초코파이 두 개, 점심과 저녁으로 마트에서 사 온 크림빵을 한 개씩 먹었으니까. 이러다가는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경각심이 들 때였다. 왜일까. 상담센터에서 현수와 먹던 음식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오늘 음식 시켜 먹는 거 어떠세요?"

직접 싸 온 음식을 주로 먹던 현수는 말했다.

"오, 시켜 먹는 거요? 그럴까요?"

그의 속을 누가 알까. 배고 고프든 아니든 누군가 제안하면 우선 좋다고, 나는 대답한다.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 있으세요?"

현수는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편이다. 물어보는 어투이지만, 메뉴 선정을 위해 나아가는 힘이 느껴진다.

"아.. 아니요. 특별히 없는데요?"

말에서 상대방의 의향이 느껴질수록 입모양만 뻐끔거리는 편인 나는 한결같이 없다고 대답한다.


현수가 이날 고른 메뉴는 수제버거였다. 상담센터에서 인턴으로 1년, 직원으로 1년, 다시 입사하여 4개월 근무하던 시기였는데 수제버거를 주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무거운 음식을 점심에 먹는다니. 오후 시간에 몰려오는 피로가 뚜렷이 예상되었지만, 숙취를 햄버거로 푼다던 그의 설명을 듣고 되돌리기는 어려워 보였다. 현수를 따라 나는 새우로 만든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를 시켰다. 


"우왓, 겁나 맛있는데요?" 점잔을 떠는 내가 전문 용어(?)를 사용할 만큼 맛있었다. 새우의 식감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패티에, 직접 만든 듯한 소스는 새우의 고소한 맛을 풍부하게 살려주었다. 신선한 채소와 부드러운 번은 덤이었다. 감자튀김까지 맛있었어서, 대부분을 케첩을 찍지 않고 먹었다. 안타깝게도, 햄버거 세트를 먹은 오후 근무는 예상대로 힘겨웠다. 노곤함이 몰려와 오른쪽 뺨을 이따금 두 대씩 스스로 때렸는데(?) 얼얼한 통증이 머무는 그때뿐, 해변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물거품처럼 나른한 상태가 이어졌다.


현수와 나, 그리고 동료들은 수제버거를 시작으로 점심시간이 되면 족발, 샌드위치, 짜장면 같은 음식을 차례대로 주문해서 먹었다. 재입사 후 4개월 만에 맛집 주문 릴레이가 이루어진 셈이다. 동료들과 수다를 떨며 먹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음식 본연의 맛을 추구하며 우리의 주문은 이어졌다. 특히, 나의 경우에는 편의점 음식으로 점심을 때우던 식습관이 배달 어플에 열광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맡은 일이 많아서, 사람들에게 치여서 먹는 걸 소홀히 했다. 편의점에서 빵이나 삼각김밥을 사 와 오물거리며 일을 처리했다. 이따금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멍을 때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모니터 앞을 떠나지 않았다. 마음은 대체로 조급했고, 점심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또한, 점심을 먹고 몰려오는 포만감이 짐스럽기 그지없었다. 과하게 먹을 바에야 '안 먹고 말지'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현수로부터 시작된 배달 음식이 잠들어있던 식성을 깨웠다. 먹는 즐거움을 다시금 깨달았던 나는, 퇴근 이후에 혼자 초밥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 주말이 되면 서울 여기저기로 돈가스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 음식의 맛을 처음 보는 순간, 음식을 음미하는 과정이나 테이블을 정리하고 계산한 뒤에 나오는 때까지, 맛집 투어는 상상만으로 콧노래를 절로 흥얼거리게 만든다. 


'아! 그래. 습관처럼 먹는 양을 조절하지 말고, 습관대로 음식을 대충 먹지 말고, 하루 한 끼는 먹고 싶은 음식을 나에게 양껏 선물하자'


불현듯 떠오른 수현과의 식탁으로 강릉의 요기조기를 나는 다니기 시작했다. 강릉도립대학 주변 맘스터치에 어려운 발걸음을 하기도 했고, 금화왕돈가스 강릉교동점에 기꺼이 들렀으며, 사람들로 북적이던 행운해장국의 문턱을 기어이 넘어갔다. 인스턴트식품으로 귀추가 주목되더라도 한 끼는 포기하지 않았다.


음식의 힘은 굉장했다. 기분의 변화를 야기하는 정도로 그 영향은 끝나지 않았다. 체력이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강릉에서도 러닝을 꾸준히 한 점도 있지만, 음식이 뒷받침되지 않았더라면 글쓰기에 집중하지 못했던 지난 며칠처럼 스스로를 여전히 탓하며 지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한 끼 정도 배불리 먹어도 피로가 크게 몰려오지 않는다. '이 정도면 영양실조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역시 졸업한 듯하다. 강릉으로 내려오기 전부터 밥을 먹는 시간을 글을 쓰는 시간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다. 가벼이 먹는 한 끼라도 아무 거나 헛되이(?) 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강릉에서 균형 있는 식사까지는 못 하고 있지만, 적어도 한 끼를 엄선해서 고른 메뉴로 먹고 있으니 만족스럽다. 더군다나, 어떠한 사정에도 점찍은 식당을 기어코 있으니 남모를 뿌듯함도 느끼고 있다. 


음식을 제 돈 주고 사 먹는 일일 뿐인데, 기분이 왜 이리 좋아질까. 잘 먹는 나, 글을 쓰는 순간에도 다시 집중하고 있는 나, 볼살이 점차 오르는 나, 모두 대견할 따름이다.


Image by PublicDomainArchiv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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