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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Apr 11. 2024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나는 MBTI로 따지면 P(인식형)임이 틀림없다. 한 가지 특징으로 생활양식을 구분하기는 어렵겠지만, 타지에서 한 달을 살겠다면서 숙소를 제외한 어떠한 계획도 세우지 않은 것을 보면 답이 나온다. 물론, 공식 검사를 해도 P가 나온다.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본 동료들은 J(판단형)가 아닌지 의심한다. 하지만, 일어나는 상황에 따라 수습하며 맞춰가는 모습이 내게는 편안하고, 익숙하다.


타인에게 J처럼 보였다면, 흔히 J로 일컬어지는 계획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뜻일 테다. 닥치면 본격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나만의 스타일로 정리(즉, 저.. 정리를 자주 안 한다고도 볼 수 있다)하는 편인 내게 회사 업무는 안 쓰던 근육에 자극으로 가해졌다. 하기 싫은 운동을 억지로 해내다 보면 자세가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며 마음이 결리고 상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강릉의 명예 주민이 된 지 셋째 날, 남산 공원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서울에만 남산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강릉 숙소에서 괜스레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3월 마지막 주에는 남산에서 벚꽃 축제를 했다고 한다. 평일 낮에 가보기로 했으므로 주차도 용이하고 한적한 공원을 경험하리라 기대했다.


다음 날 아침, 내비게이션(이하 내비)으로 지명을 쳤는데 검색되지 않았다. '어라, 공원이 사라졌나?' 지난주까지 축제의 현장이었던 곳이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일까. 당황한 상태로 지도에 '공원'을 검색하여 찾아보다가, 스스로 저지른 황당한 실수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동 공원으로 검색했다니.. 서울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을까?'


검색어를 명동에서 남산으로 바꾸니 내비에서 바로 검색이 되었다(참고로 서울의 남산명동과 밀접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숙소에서 명동, 아니 남산공원까지 거리는 20km 남짓, 오전 10시에 이르러 무사히 주차할 수 있었다. 남산에는 소풍을 온 아이들이 많았다. 잔디가 깔린 너른 공터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어울려 앉은 화사한 웃음들이 마음으로 다소곳이 다가왔다. 그 밖에도 배드민턴장에서 복싱 훈련을 하던 사람들,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 바빴던 커플들, 휠체어를 탄 부모를 모시고 온 가족, 환경을 돌보던 직원에 이르기까지 공원에 머무는 이들은 다양했다. 한 걸음씩, 깨어나는 봄 어귀를 감상하며 명동의 매력에 점차 빠져들었다.


Image by wal_172619 from Pixabay


"따끼 따끼, 이거 봐봐라"

조카들만 보면 좌충우돌이나, 우당탕탕 같은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어어.. 우진아, 서진아. 그러다가 넘어져!"

나는 돌로 된, 얕은 턱으로 올라가 외줄 타기를 하듯 걸어가는 조카들을 보며 다급히 말한다.


조카들이 넘어지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도, 조카들 나이대에 비슷한 행동을 많이 했었다는 걸 이내 상기한다. 외돌 타기(?)의 핵심은 팔로 수평을 그리며 균형을 잡아가는 데에 있다. 어느 정도 걷다 보면 휘청거리는 순간을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때, 균형을 잃어간다는 것을 신속히 알아차리고, 상체를 반대쪽으로 움직이며 균형을 맞춰가야 한다.


비단 외돌 타기 뿐만이 아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는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한쪽으로 크게 쏠려있고, 자신이 기울어진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한다면, 이내 스러지고 말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 회사에서 내가 균형을 잃었던 순간은 주로 부탁받는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거절하는 게 단순히 어려워서, 거절한 이후에 관계가 어색해지는 게 불편해서 수락했다. 한 번의 긍정은 이 정도는 가능하다는 가늠의 선을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존재하는 선은 아니지만, 부탁할 만한 일이 생겼을 때 가능 여부를 짐작해 보도록 하는 일종의 실선과 유사하다.


누군가의 부탁이 심적인 부담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스스로 원해서 수락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내가 만난 몇몇 사람들은 가늠선을 넘고자 하는 욕망을 타고난 듯했다. 내가 10을 괜찮다고 하니, 다음에는 11을, 그다음에는 12를 부탁하는 셈이다. 처음부터 어렵다고 거절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거절하는 즉시 겪게 될 미묘한 간극을 피하고 싶어서, 더 요구하는 상대를 불편해하면서도 이내 순응하는 태도로 맞던 나의 무릎은 흉터와 상처로 가득하다.


"혹시, 이것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언젠가 인턴으로 근무하던 제훈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사실 답정너처럼 예의상 물어본 거였는데, 그가 거절할 줄은 몰랐다.

"아, 그렇군요..."

타고난 쫄보답게 이유를 되묻지 못한 나는 우선 자리로 후다닥 돌아왔다.


제훈은 자기표현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누가 물어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가 세운 계획이나 원칙에 따라 자신의 행동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되는 건 되고,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정확히 말하는 성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탁을 들어주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보면 그에게는 충분히 합당한 내용이었다. 그나마 친해지고 나서 제훈이 일전에 거절한 상황에서의 속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그가 흔쾌히 거절할 때는 사실 기분이 좀 상하기는 했었다. 어떤 일인지 설명을 채 하지도 않았는데, 덜컥 어렵다고 대답한다니.


하지만, 여유 시간이 애초에 없는 상황에서 무슨 일인지는 제훈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당시 제훈은 내 일을 도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애써 더 설명하기 전에 어렵다는 대답을 먼저 들려준 것이다. 일종의 배려인 셈이었다. 단호박 같은 거절이라도, 거절을 받는 당시 기분이 마냥 좋지는 않을지라도, 지속되는 관계를 통하여 긴장과 오해를 충분히 풀어갈 수 있다. 하물며 무른 호박에 속하는 나의 거절이, 받는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줄 수 있을까. 어림없을 것이다.


강릉에 와서 또한 좋은 점으로는 거절할 만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서울로 들어서면 구구절절 거절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에게 보인 제훈의 거절을 떠올리며 어렵겠다고 기꺼이 말해야겠다. 내가 좋아하거나, 좋아하고 싶은 이들을 대상으로 불편해할 만한 이유를 스스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들 또한 나를 좋아하거나, 좋아하고 싶다면 무딘 나의 거절을 스스럼없이 받아주지 않을까.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예행연습으로 적어보았는데. 음.. 아무래도 좀 어색한 거 같다.

하지만, 나는 P이므로 거절할 상황이 주어지면 용기 내어 부딪쳐 보겠다고 다짐한다. 


* MBTI 유형을 단순한 몇 가지 행동이나 특징으로 구분하기는 어려으므로, 본 글은 재미로만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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