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샘,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였죠?"
지난 몇 달간, 자주 들었던 의문형 문장이다.
"아.. 그게 말이지요..."
결론만 말하면 되지만 장황한 설명이 기어코 이어진다.
"이러저러해서 시작되었는데.. 작년에는... 올해에는... 그리하여..."
퇴사하기 전, 나는 부서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직원이었다. 그래봐야 다음으로 입사한 직원과는 3개월 차이였지만. 다만, 이 부서에서 나는 인턴으로 근무하기도 했었고, 재취업 전에 1년 동안 근무했던 경력이 있었으므로 '선배'라는 호칭이 아무래도 어울렸다.
뜬금없이 나의 특징 중 한 가지를 고백하자면, 나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부모에게 물려받고 싶지 않은 부분을 인식하며 살아간다. 아빠는 어려서부텨 수시로 일을 시키던 할아버지가 싫었어서 나를 키울 때 무엇이든 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스스로 찾아가기를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제한된 경험 속에서 내가 선택해 볼 수 있는 활동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스스로의 선호를 모르니 정보를 아무리 수집해도 불확실해 보였다. 주저하고 서성이던 것이 학창 시절 나의 주된 모습이다. 아빠는 내게 알려주고 싶거나 기대하는 바가 있었을 테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양육 방식이 다른 형태로 대물림 되었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아이고.. 어디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머뭇거리던 택배 기사는 말했다.
"어디 찾아오셨는데요?"
까랑한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온다. 내가 익히 아는 엄마가 등장한 것이다.
"아, 여기 706호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아래층에 있어요. 아래층으로 가세요"
엄마는 타인에 대한 관심, 속된 말로 오지랖이 넓은 편이다. 엄마에게는 홍은동이라는 지명보다, 지구촌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경향이 있다. 앞서 만난 택배기사처럼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눈에 띄는 사람들은 대부분 엄마의 이웃이 되어버리고는 한다. 이 오지랖을 부리는 성향을 엄마에게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오지랖의 맛을 전파하기 위해 도리어 앞장서게 되는 모습을 스스로를 인식하며 깜짝 놀라고는 한다. 가장 오래 근속한 직원으로서 오지랖을 부릴 수 있는 상황이 부서 도처에 널려있었으니...
"아하, 그 일을 말이지요.."
"아.. 그 일은 자고로 2022년 경험을 떠올려보면.."
"어, 그건요. 자, 여기를 보시면..."
"아이고, 진작에 저부터 찾아왔어야죠~"
센터의 보안관이라도 되는 듯이 나대던 꼴이 우승을 법도 한데. 설명해 주어서 고맙다며 동료들은 드높게 비행기를 태워주었다. 오지랖과 칭찬은 접착력이 강해서 맛을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떼어내기 어렵다. 꼭 언어적인 반응이 아니더라도 고마운 기색을 보이는 타인을 보면 헤매는 사람을 찾아다니고 싶을 정도가 된다. 그러나, 나는 애석하게도 내향적인 사람이다. 오지랖을 한 번 떨고 나면 충천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 시작은 순수한 선의였지만, 동료들이 나를 찾는 빈도가 점차 많아졌다.
'똑.. 똑.. 똑..'
인위적이 느낌의 둔탁한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온다.
"오, 현지샘"
다가온 것조차 몰랐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나는 대답한다.
"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요"
현지샘은 나보다 한 주 늦게 입사한, 직책은 행정 조교였다. 센터에서 가장 최전선의 일을 담당하는 말단의 두 직원이 바뀌며 현지샘과 나는 서로에게 물어가며 위기를 극복해 갔다. 언제부턴가는 현지샘에 내게 물어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모두 과거에 근무했던 고작 1년 경력으로 알고 있던 것 때문이었다.
현지샘의 걸음은 가히 구름의 움직임 같았다. 층이 있는 건물에서 살게 된다면 아랫집에서 사랑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리하여 "수호샘~"하며 말을 걸어올 때마다 "아이쿠, 깜짝이야!" 앉은 상태로 요란스럽게 폴짝 뛰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반 농담 삼아 "으흠, 가까이 오면 노크 좀 부탁할게요.."라고 말한 적이 있었고, 그 이후로 현지샘은 눈썹까지 오는 가림막 위를 주먹으로 세 번씩 두들기고는 했다.
오지랖을 부리며 스스로 자처하긴 하였으나, 관여하게 되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오전 중으로 지치는 날이 많았다. 점심을 동료들과 먹지 않고, 교내 으슥한 곳으로 나아가 이따금 멍을 때리던 것은 살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그렇다고 동료들이 주춤거리거나 고민하는 모습을 모른 척하기에는 내가 일찍이 경험해 본 일들이 많았고, 칭찬이라는 달콤한 보상을 포기하기에는 스스로 잘 해내고 있다는 믿음이 부족했다.
"아.. 죄송하지만, 기한을 조금만 늦출 수 있을까요?"
"아.. 거듭 번거롭게 부탁드려 죄송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더 꼼꼼하게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던 일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내가 쓰던 '죄송 레퍼토리'이다. 특히, 타 부서 사람들이나 상사와 통화하며 사용하였는데, 실수를 인정하거나 실례를 언급하면 문제는 대체로 해결되었지만 씁쓸한 기분이 부상처럼 주어졌다. 회사에 근무해 보면 직급이 낮을수록 일에 관한 자신의 영향력이 미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견해로 일을 계획하거나 시행하기보다는, 그 일을 추진하며 돌아올 수 있는 피드백을 앞서 생각하게 된다. 타인을 의식할수록 일을 처리하는 속도는 자연스레 늦어진다. 도리어 나도, 받아보는 사람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형태로 일을 처리하는 굴레로 빠지게 되고 만다.
회사 업무로 좌절하는 상황을 경험할수록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잘 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 긍정적인 보상이 예상되는 동료들 사이에서 오지랖을 부렸다.
강릉에 오며 백수가 되었다.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딱히 없어졌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어려워하는 소극적인 성향이라, 크게 우려되었던 일은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단절되는 것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강릉에서 혼자 지낼 생각만으로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일전에 강릉으로 여행 왔을 때도 3일간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은 적이 있다. 그러다가 콘서트 티켓 환불을 위해 고객센터 직원과 통화하였는데, 사무적인 대화에서도 기쁨으로 물드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독거 청년이 되는 게 많이 두렵기는 했나 보다. 강릉에 잘 도착했냐는 연락이 많이 오고 있다. 그만큼 떠들고 다닌 모양이다.
"하하, 영진해변에서 처음 바다를 찍었어요"
카페에서 찍은 바다 사진을 단톡방에 올리며 적는다.
"오, 강릉 감성이 느껴지네요. 편히 쉬다 와요"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고, 그냥 마음 편히 쉬고 오라고 한다.
"저녁은 뭐 먹었어요?"
"하하, 컵라면 먹었어요"
간단히 먹었다는 나의 대답을 듣고, 말을 잇는다.
"아이고, 강릉에서는 먹고 싶은 거, 먹고 싶었던 거 모두 먹고 와요"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묻지 않고, 그저 배불리 먹으라고 한다.
서른일곱이다. 게다가 백수이다. 한 달이란 기간을 인생에서 유예하기로 스스로 결심했지만, 조바심으로 이어지기 딱 좋은 상황이다. 회사에 소속되어 사회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누군가가 "지금 뭐 해?", "쉬고 돌아온 다음 계획은 뭐야?" 묻는다면 절망감에 이내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강릉으로 떠난다고 시시콜콜 떠들었던 이들은 콧바람 잘 쐬고,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을 오직 건넨다.
'아, 바다를 충분히 감상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양껏 먹는 것이 지금 내가 잘 해내야 하는 것이구나!'
쉬기로 결심하고 강릉으로 내려왔으므로 내게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마음을 돌보는 일이다. 고려해야 할 누군가는 적어도 이곳, 강릉에는 없다. 나만 생각하면 된다. 이제는, 최소한 한 달 동안은 나의 마음에게 스스로 오지랖을 부려야겠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주고 위하는 스스로를 기꺼이 칭찬해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