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손맛을 따라가는 이국의 저녁

<그리움과 성찰> 시리즈 8

by 이민자의 부엌


이곳 캐나다에서는 한국의 늙은 호박을 찾기 어렵다.
그럴 때면 문득, 친정어머니가 정성껏 끓여주시던 호박죽이 떠오른다.
부엌 가득 퍼지던 달큰한 향기,
온 가족이 둘러앉아 나눠 먹던 그 따뜻한 그릇 하나에
사랑과 온기가 함께 담겨 있었다.
그 시절의 풍경은 내 마음속에 여전히 선명하다.


그리움이 밀려오는 건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머나먼 이국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삶의 외로움 때문일까.
세월이 흘러도, 어머니의 부엌은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 있다.


비록 이곳엔 늙은 호박은 없지만,
나는 단호박과 땅콩호박으로 그 시절의 맛을 되살려본다.
부드럽고 달콤한 단호박은 남편도 무척 좋아한다.
얼마 전 코스트코에서 올해 수확한 단호박과 땅콩호박이 세일을 하기에 몇 개 사두었는데,
오늘 저녁, 우리 부부의 식탁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주인공이 되었다.
이 작은 준비가 우리 삶에 건강과 온기를 더해준다.


오늘 저녁 메뉴는 호박죽이다.
화려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지만,
그 담백하고 은은한 맛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진 오늘,
내일 새벽엔 서리가 내린다고 하니 이 계절에 딱 어울리는 음식이다.


호박의 껍질을 벗기고 씨를 제거한 뒤, 넉넉한 물에 푹 끓인다.
부드럽게 익은 호박은 믹서기에 곱게 갈아 다시 냄비에 붓고,
찹쌀가루를 넣어 걸쭉하게 끓인다.
미리 삶아둔 호랑이콩을 넣고, 마지막엔 소금과 꿀로 간을 맞춘다.
그리하여 완성된 호박죽은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정성과 기억이 담긴 한 그릇의 위로다.


우리 부부가 먹는 호박죽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다.
삶의 균형과 마음의 평화를 지켜주는 의식에 가깝다.
건강한 먹거리를 추구하는 우리에게는 식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언제 먹어도 부담 없는 달콤한 맛,
남편이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니 절로 흥이 난다.
남은 호박죽은 내일 남편의 도시락으로 준비해 둘 예정이다.


식탁에 마주 앉아 따뜻한 호박죽을 한 숟가락 떠먹는다.
그 순간, 입안에 퍼지는 달콤함보다 먼저
가슴속에 그리움의 온기가 번져온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시작된 그 맛은
시간과 바다를 건너 내 부엌까지 흘러왔다.
그리움은 이렇게, 세대를 잇는 조용한 향기가 된다.


문득, 나는 생각한다.
이민의 세월 속에서 내가 가장 잃지 말아야 했던 건,
바로 이런 ‘작은 온기’가 아니었을까.
한 그릇의 호박죽 속에 담긴 정성,
그 정성이 곧 사랑이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오늘도, 이곳 캐나다의 부엌에서 어머니의 향기가 담긴 그리움을 끓인다.
그리움은 향이 되어 퍼지고, 기억은 맛이 되어 입 안에 머문다.
그리고 그 따뜻한 한 그릇이,
이국의 저녁을 조용히 밝혀준다.


오늘 밤, 부엌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든다.
그 빛 아래에서 나는 혼잣말처럼 미소 짓는다.
“어머니, 오늘도 당신의 맛으로 하루를 마무리했어요.”
그 말 한마디가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기도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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