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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간을 똑, 떼어다 당신에게 주고 싶다.

우울증 10년 차 간호사의 비워야 채워지는 것들

by 빛줄기


"나 안가. 가면 죽어. 안가. 살고 싶어"

매일, 죽을 결심을 하던 나에게 환자는 울며 힘없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더 큰 병원에 치료하러 갔다 오시는 거예요. 잘 다녀오셔야 해요."

나의 아프지만, 건강한 삶을, 시간을, 겁에 질린 아이처럼 우는 어르신께 나누어 드리고 싶었다.

비집고 나오는 울음을 꾹 참으며 차디 찬 손을 잡으니, 목이 메어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눈앞에는 먹구름이 드리웠다.

방호복 안으로 뜨거운 숨이 가득 차 시야가 흐려지는 건지, 눈물에 시야가 흐려지는 건지 헷갈렸다.

손을 놓아드리고, 구급차 안으로 들어가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블러 처리된 마냥 흐려져만 갔다.



-



코로나19가 활개 치고, 온 나라가 비상인 그때, 나는 코로나19 환자들만 수용하는 음압격리병동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있던 병동은 기저질환이 있지만, 증상은 심하지 않은 ‘경증’의 환자를 돌보던 곳으로, 큰 이벤트가 많지 않았었다.



3일 연속 밤샘 근무의 끝자락, 콜라에 온몸의 뼈가 절여진 듯 무겁고, 뻐근한 몸을 이끌고 출근을 했다.

무거운 방호복으로 갈아입고, 두 겹의 전동문을 지나 격리 병동에 들어섰다.



병동의 복도는 고요했고, 그저 내가 움직일 때 스치는 부스럭거리는 방호복 소리와 방호복 안에서 답답한 숨을 몰아쉬는 내 숨소리만이 들려오는 소리의 전부였다. 근무 시작 전에 환자의 상태와 바뀐 처방, 수행된 간호 등에 대해 인계를 받고, 맨 앞 병실의 ‘권 씨 할아버지’께서 식사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처방된 영양제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드르륵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아니라면, 적막만이 감돌아야 할 병동에서 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에도 잘 놀라는 나는 후추알만 한 내 가슴이 더 쪼개져 사라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놀라 콩알탄 마냥 튀어 오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준비 중인 영양제 수액의 주인 권 씨 할아버지가 서있었다.


할아버지는 고혈압과 당뇨가 있으셨지만, 나이에 비해 비교적 건강하게 입원하신 분이었다. 염색을 못한 지 꽤나 오래되어 자라난 흰머리는 몇 달 전에 돌아가셨다는 아내분의 빈자리를 고스란히 나타내었다. 처지고, 서글서글한 눈매와 웃을 때마다 깊어지는 눈가 주름과 팔자 주름은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자주 웃는 표정을 짓는지 증명해 주는 듯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만 벨을 눌러,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느긋하게 “선생”이라 부르며 간호사들을 찾곤 했던 분이 병실의 문을 연 상태로 트레이에 놓인 흰색의 영양 수액을 바라보며 서계셨다.


“어르신, 무슨 일 있으세요? 왜 나오셨어요. 나오면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얼른 다시 들어가세요.”


멀뚱히 서있는 권 씨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는 방호복에 가려지고. 마스크에 눌려 붕어눈이 되었을 나의 눈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 의료용 장갑을 여러 겹 낀 두툼한 손으로 등을 토닥이며 다시 한번 말했다.


“환자분, 이러다 넘어지셔요. 얼른 저랑 같이 들어가요.”

“안가. 그냥 선생 따라다니기만 할게.”

“음압 병실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마침 영양제도 맞고 하셔야 하니까 같이 들어가요. “


거동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던 할아버지는 우뚝 서서 다독이는 나의 손을 내리치며 고집을 부렸다. 방호복 안에서 유일하게 환자에게 보일 내 눈썹과 눈이 잔뜩 일그러졌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화장실 갈 시간도 없는데, 그렇게 모든 것이 미루어지는 찰나의 순간이 슬로 모션을 걸기라도 한 듯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목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짜증이 섞여 나왔다. 조급증이 도졌다.


“뭐 어디가 불편하셔서 그러세요? 일단 같이 자리로 돌아가서 말씀해 주실래요?”

“저 안에 웬 남자들이 서있어. 나를 데려가려는 거야. 안돼”

전 날까지만 해도 나에게 ‘상냥한 선생’이라는 호칭을 쓰며 주름이 휘어지게 웃던 눈에 두려움이 어둡게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환자들의 ‘섬망’ 상태는 수없이 봐왔지만, 밤늦은 시간에 격리 병동 안에 있는 간호사는 나 혼자였던 터라 섬찟했다. 하지만 나의 뒤로 밀려있는 산더미 같은 일들이 다시 파도처럼 밀려오듯 떠올랐다. 일그러진 표정을 펴고, 최대한 태연하고 느긋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지금 코로나 때문에 아무나 못 들어오는 거 아시잖아요~ 저희가 다 cctv로 확인 중이니까 걱정 마셔요. 식사 안 하셔서 몸이 허해지셨나 보다. 얼른 영양제 맞으러 가요.”


권 씨 할아버지는 다행히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고, 함께 병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영양제는 기어코 맞지 않겠다고 하여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항복했다. 격리병동 내에서 처방된 처치를 모두 마치고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방금 전의 상황을 동료 간호사에게 알렸다. 병원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고 있을 당직 의사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영양제 처방은 취소되었고, 다른 특별한 처방은 없었다. 밤샘 근무 동안, 피로로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고, 눈꺼풀 또한 점점 내려앉아 갔다.


그런데, 병동 복도에 설치된 시시티브이를 비추는 화면에 누군가 서있었다. 권 씨 할아버지였다. 한숨을 깊게 들이 내쉬고 동료 간호사와 눈빛을 교환했다.

입 밖으로 오늘 밤은 길겠구나.라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동 들어갔다 올게요.”

밤새 할아버지의 이상행동은 계속되어 답답한 방호복을 입고, 격리 병동 안에서 할아버지의 곁을 지켜야 했다. 근무가 끝나갈 무렵, 다음번 간호사에게 권 씨 할아버지의 상태를 인계하며 걱정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3일 내리 휴일이 코 앞에 왔는데, 권 씨 할아버지가 밤새 불안해하시던 모습이 이내 마음에 걸리고, 찝찝했다. 모두가 출근하는 만원 버스에 나 혼자 퇴근하기 위해 오르며 몰려오는 피곤함과 찝찝한 마음이 더 해져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그렇게 퇴근 후에 하루를 내리 잠만 잤다.


-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벚꽃 구경을 다녀왔다. 따사로운 햇살에 서늘한 바람까지 불어 꽃구경을 나온 모두의 표정에 행복이 가득했다. 하얗게 내리는 벚꽃을 보며 꽉 매였던 마음의 매듭이 조금은 풀어지는 듯했다.

벚꽃 구경을 다녀오고, 밀린 과제를 하듯 정신과 상담을 다녀왔다.

어떻게 지내느냐는 질문에 직장일이 신경 쓰여 제대로 쉬지 못하겠다고 했다.

직장일은 금방 잊어야 한다, 퇴근 후엔 일과 생활을 완전히 분리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조언. 어쩐지 와닿는 말은 아니었다. 학업, 직장, 대인관계 등 모든 것이 내 삶의 영역인데 어떻게 분리하라는 건지, 생각처럼 되면 좀 좋으랴. 그렇게만 되었다면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우울증이라는 지독한 병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3일간의 휴일이 게 눈 감추듯 지나가고, 출근을 앞둔 전날 밤에는 더 울적해졌다.

‘할아버지는 괜찮으실까, 상태가 더 나빠지셨으면 어쩌지.’ 되뇐다고 나아지지 않을 걱정을 하며 거진 밤을 지새우고 출근을 했다.


권 씨 할아버지에게 3일이라는 시간은 무척이나 빠르고, 힘들고, 무겁게 흘러간 듯했다.

내가 마지막 나이트 근무를 한 기점으로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식사는 전혀 하지 못하고, 소변량이 점점 줄어 소변줄을 달고 계셨다. 고유량 산소 호흡기를 달았음에도 동맥혈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간 인공호흡기의 도움까지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정확히 의식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점점 나빠지는 본인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고 했다.

그리고, 이에 적절한 처방을 수행하기엔 현재 입원해 있는 병원이 적절치 못하다는 것도 눈치채셨을 것이다.


그 말인즉슨, 중증의 코로나 환자를 케어할 수 있는 코로나 중환자실이 있는 병원으로 전원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수인계를 받는 내내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심각하게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았다.

화면 속 간호기록 창에는 할아버지의 상태가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눈의 공막에 노랗게 하나의 막이 더 낀 듯 관찰되며, 안 그래도 어두웠던 피부색이 원래에 비해 더 어두워 보인다는 기록, 그리고 간 수치가 크게 튀고, 소변량도 점점 줄고 있는 양상을 보였다. 한숨부터 나왔다.

가족과 주치의는 이미 상의를 마치고, 전원을 하기 위한 절차는 끝이 나 있는 상태였다.


격리 병동에 들어서기에 앞서 겁이 덜컥 났다.

꼭 ‘선생’이라고 부르며 서글서글한 눈이 휘어지게 웃으시던 권 씨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겁이 났다.

평소보다 느리게 유니폼 위로 방호복을 걸쳤다. 마스크를 쓰자 숨이 빠르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고, 금세 답답해졌다.

의료용 장갑을 낀 손은 안에서 땀으로 빠르게 적셔져 장갑이 불쾌하게 피부에 들러붙었다. 왜인지 나는 긴장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방호복을 다 착용하고는, 격리 병동으로 향하는 문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거기까진 문제가 없었다. 유리문 안으로 내다보이는 격리병동의 복도는 그저 평화로워 보였다. 문제는 병실의 문이었다.

가장 먼저 권 씨 할아버지의 병실 문을 두들겼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3일 사이의 변화라고는 믿기지 않게 푸석해진 모습으로 눈을 감고 누워계셨다.

“ㅇㅇ님~”

“...”

“어르신~ 저 왔어요. 상냥한 선생.”

‘ㅇㅇ님’이라는 호칭에는 반응 없이 감고 있던 눈이‘어르신’이라는 말에 금세 열리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힘이 없는 눈빛이지만 얼굴에서 반가움이 보였다.


“선생, 왜 이렇게 오래 안 보였어. 나 힘들었다고. 이제 집에 가야겠어. 너무 답답하고, 집도 엉망이 되었을 거야.”

할아버지의 갈라지는 목소리가 내 마음까지 갈라지게 만든다.

‘오늘 집에 못 가세요.’, ‘가족 분들이 더 좋은 치료받으러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하셨데요.’, ‘상태가 안 좋아서 다른 병원 가시기로 했어요’ 등 딱딱한 사실을 담은 말들이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정신없이 머릿속을 굴러다니며 상처를 내고 있었다. 아무 말도 못 꺼내고 있는 나에게 할아버지는 다시 한번 말해왔다.


“안 그래도 아까 여사님이 내 짐을 챙기더라고. 빨리 집에 갔으면 좋겠네. 여긴 너무 답답해.”

마음이 한번 더 갈라졌다. 집에 갈 기대에 설레어서, 혹여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병원으로 보내질까 두려워, 숨 쉬는 것도 벅찬 할아버지께서 점점 말이 많아지는 것을 보다가 결단을 내렸다. 말해야 한다.


“어르신, 더 좋은 병원에 가서 확실히 치료받고, 집으로 가신데요. 가족 분들이랑 의사 선생님께서 이야기 마치셨데요. 더 좋은 병원으로 가시는 거예요.”


내 말을 들은 권 씨 할아버지의 어두워진 낯빛이 더 어두워지다 못해 사색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이송될 구급차가 올 때까지 일을 하는 내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간호사로서 불안에 떨고 있는 할아버지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설득해야 했다.

준비가 안된 권 씨 할아버지는 이내 눈물을 훔쳤다. 할아버지의 눈물은 내 마음에 스며들어, 나중엔 흘러넘칠 것 같은 댐 마냥 마음이 넘실거렸다.



모든 전원 준비를 마치고, 구급차가 준비되었다.

“나 안가. 가면 죽어. 그리로 가면 난 죽어. 집에 보내달라고 안 할게. 여기 있을게.”

할아버지는 이송침대로 옮겨져서까지 애처롭게 울며 떼를 썼다. 얼굴은 겁에 질려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겹의 장갑을 껴서 체온조차 전달되지 않을 손으로 할아버지의 찬 손을 잡고 안심시켜 드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권 씨 할아버지는 병원을 떠났다.

그날 하루동안, 나는 너무나도 멍한 상태에 빠졌다.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본다면 근무 중에 넋이 나가 있는 정신 나간 간호사라고 욕했을 것이다.


10년의 긴 우울증, 간호사로서의 경력보다도 길고 화려한 경력의 우울증으로 매일 잠에 들기 전, 고통 없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 죽어도 정리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이처럼 울며 삶을 갈구하는 권 씨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런 나에게 큰 죄책감을 짊어주었다.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죽고자 생각했던 날들이 누군가에겐 너무나 소중하고, 간절한 하루인 것이다.


나의 정신은 불완전하지만, 신체는 건강한 삶을 똑, 떼어다 그들에게 주고 싶다. 직장과 일상을 어느 정도 분리해야 한다는 정신과 주치의의 말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지켜지지 못했다.


내 부끄러운 하루가 당신에게 가치 있는 하루가 될 수 있다면, 간절한 하루라면, 남은 수명을 전부 가져가라고 하고 싶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직업을 갖고, 나의 삶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유 없이 죽음에 더 가까운 생각을 해왔을 뿐이다.

이렇게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며 권 씨 할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할 순 없다.


쓰러지면서도 계속 살아낸 마음속 헌 감정을 정리하고, 삶의 이유를, 가치를 찾기 위해 글을 써본다.


조용히 위로받고 싶은 사람, 누군가 한 명이라도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우리, 잘 살아봅시다.”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글이 당신의 마음속 버리지 못한 아픈 감정들을 대신 정리해 주는 작은 ‘수거함’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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