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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빛의 반대편에서_존재의 맹점

by 박세신

오랜 세월, 나는 인류의 발전을 지켜봤다.

얼마나 처절하게 발버둥 치며 여기까지 왔는지,

그 모든 과정을 기억한다.


이 존재들은 충분할 듯 충분하지 않게 역사를 써 내려갔다.

저마다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

수많은 실험과 전쟁, 그리고 희생을 반복했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난 그 세월 속에서

수많은 불행의 향기를 만끽해 왔다.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이 든다.

‘너무 쉽다. 쉬워도, 너무 쉽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사람의 불행을 느끼 보고 싶었다.


그 여자의 남편과 게임을 했었다.

서로의 가장 소중한 것을 걸었는데,

그를 놀리는 일은 꽤 즐거웠다.

그와의 게임에서 눈, 뇌, 심장을 걸었고,

그는 '눈'을 골랐다.

나는 그것을 아내에게서 빼앗아갔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

그 뒤로 비친 그의 불안한 눈동자가—

정말로 달콤했다.


사실, 난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칠 수는 없다.

그저 냄새를 맡을 뿐이다.

그의 아내에게서 풍기던,

점점 흐려져 가는 생의 냄새.

'침묵의 살인자'라고도 불리는

당뇨가 상당히 진행됐고,

심장 질환과 뇌졸중으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남편이 무엇을 골랐든,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을 잃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병원에 가지도 못했다.

그저 일만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절망의 냄새를 흠뻑 들이마셨다.


그런데 요즘, 뭔가 이상하다.


그녀는 더욱더 불행해져야 했는데,

그 향기가 너무 옅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직접 찾아갔다.


“다시 세상을 보고 싶지 않나요?”

그녀는 낯선 목소리에

손끝으로 허공을 가르며 물었다.


“누구세요?”


나는 최대한 낮고 매끄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대가 잃은 것을 되돌려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눈을, 세상을, 그리고 당신이 잃어버린 삶을.”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런 게 가능해요?”


"불가능하진 않아요.

단지 한 가지 대가가 있을 뿐이죠.

― 남편을 포기하는 것."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했으면 좋았겠네요.”


나는 미세하게 눈을 찡그렸다.
이런 식의 인간이 제일 피곤했다.
희망도 절망도 없는 목소리.
욕망이 없으면 거래도 불가능했다.


“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살던 세상을.”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글쎄요. 그때는 봤던 것도 금방 잊어버렸어요.

그냥 다 지나가더라고요.”


“무슨 뜻이죠?”


“사람 얼굴도, 표정도, 금세 흐릿해졌어요.
눈이 멀고 나서야 그게 이상하게 또렷해졌어요.”


나는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
“그건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이겠죠.”


“그럴 수도 있겠죠.”
그녀는 담담했다.

“근데 요즘엔 그런 말도 괜찮더라고요.”


“그럼 당신은 지금의 자신에 만족합니까?
앞도 못 보고, 세상은 멀어지고, 아무 쓸모도 없는데?”


그녀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빛이 없는데도, 마치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쓸모라…”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예전엔 뭐라도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어느 날 문득, 아무것도 안 해도 하루가 가더라고요.
그게 좀 신기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그냥 살아요.
밥 먹고, 자고, 깨고, 또 자고.
별일 없어도 하루는 가고, 내일이 오더라고요.”


그녀의 말은 단순했지만,
나에게선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건 허무가 아니라, 이상한 평온이었다.
어떤 힘도 닿지 않는 자리의 목소리.


“그럼 행복합니까?”


“행복은 모르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자꾸 뭘 바꾸려는 게 피곤해서요.
그냥 지금처럼 숨만 쉬어도 괜찮은 날이 있더라고요.”


그녀의 어투엔 철학도, 신념도 없었다.
그저 오래 피로한 사람이 내뱉는 말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이상한 불안을 느꼈다.
그녀의 말은 논리보다 단단했다.
그건 계산이 아니라, 삶의 잔향이었다.


나는 물었다.
“당신은 아직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낍니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근데 아직 숨이 있잖아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답엔 공허도, 의미도 없었지만
묘하게 완성된 형태의 ‘존재’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군요.”


그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다행이네요.
평범하게 살기엔, 세상이 좀 시끄러워서요.”


웃음이 나왔다.
“그대 같은 인간 때문에 세상이 멈춰요.”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도 흐르잖아요.”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단순했지만, 완벽했다.
세상은 그녀가 뭘 하든 계속 흐르고,
그녀는 그 흐름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렇게 그 방을 나왔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어둠을 더듬었다.
그 속엔 온도가 있었고, 흐름이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세상은 여전히 흘러가고, 나도 그 안에서 숨을 쉬니까요.”

그리고 그 말 뒤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저 존재만이 남았다.


존재들은 욕망으로 변화를 추구했지만,
사실은 존재 자체로 증명되고 있었다.


더 나아가려는 모든 발걸음이 멈춘 그 순간에,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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