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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존재 가치를 효율로 환산하는 자

Part 2 - 존재의 환원

by 박세신

실험동의서에 남겨진 서명들이 데이터베이스에 차곡차곡 저장되었다.

서류는 이미 구겨진 인간들의 마지막 의지였다.

그들이 꿈꿨던 건 치료였지만, 연구진이 추구한 건 효율이었다.

그리고 그 효율은 이제 숫자로, 그래프와 파동으로 환산되고 있었다.


[Phase 1 : SUBJ-014 ― 증발]

노인의 손에는 주름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마치 세월의 금처럼.
피부 아래에서 피가 느리게 돌았다.
그 온기가 사라지기 직전의 순간, 장치가 작동했다.


푸른 빛이 실험실을 덮었다.
빛은 공기를 가르고, 벽면에 얇은 파문을 남겼다.
노인의 몸이 천천히 떨렸다.
마치 얕은 물 위의 그림자처럼 흔들리더니, 서서히 옅어졌다.


한 연구원이 숨을 들이켰다.
모니터 위에서 그래프가 흔들렸다가 직선으로 가라앉았다.
누군가 입술을 다물었다.

기계음이 멎자, 그 자리에 남은 건 공기뿐이었다.


노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침대의 시트는 그대로였다.
주름 사이에 남은 체온이 아주 천천히 식고 있었다.


누군가 메모를 입력했다.
“신체 소실. 데이터 저장 완료.”
잠시 후, 같은 손이 또 다른 문장을 입력했다.
“형태 변화. 반응 안정. 생체 질병 없음.”


그 단어 하나가 인간의 생사를 가르고 있었다.

내부용 기록, 외부용 기록으로.


그들의 명분은 이러하다.

"모든 유기 조직은 생체 질병의 근원이며, 감염의 매개체다.
세포 크기를 미세 단위로 축소하면, 병원체의 결합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한다.

이 과정은 면역계의 자율성을 유지한 채로, 체내 바이러스·세균의 생존 환경을 원천적으로 제거한다.
결과적으로 ‘질병’이라는 개념 자체가 소멸한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선, 물리적 축소가 불가피하다."


[Phase 2 : SUBJ-019 ― 껍데기]

침대 위, 얇은 천을 덮은 몸 아래로 미세한 진동이 흘렀다.
기계음은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고, 전자파의 미세한 떨림이 공기를 갈라놓았다.


“압력 안정. 앵커 반응 정상.”
“2단계 축소 진입.”


기계의 코일이 회전하자, 공기가 뒤집혔다.
몸의 윤곽이 흔들렸다.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단단한 파열음이 들렸다.
울음도, 경보도 없었다.
그저 ‘무언가가 사라지는’ 소리만 있었다.


조명은 변하지 않았지만, 방 안의 공기가 한순간 가벼워졌다.
사람 한 명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던 ‘밀도’ 자체가 사라지는 듯한 순간이었다.


모니터의 수치는 안정적이었다.
심박, 호흡, 체온 — 모두 정상 범위.
그러나 화면 속 내부 구조는 텅 비어 있었다.
내장 기관의 선이 흐려지고, 그 자리에 잔잔한 노이즈가 흩어졌다.
심장 자리에는 그림자처럼 남은 한 줄의 음영만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부... 공명음이 사라졌습니다.”
한 연구원의 목소리가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누군가의 손이 멈췄다.
“유지해.”
그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책임감도 공포도 아닌, ‘이해할 수 없는 성공’ 앞에서의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냉각 장치의 소리가 점점 커졌다.
방 안의 온도가 낮아지고, 표면에 얇은 서리가 맺혔다.
피험자의 얼굴은 고요했다.
그 얼굴은 마치 긴 잠에 든 사람처럼, 평화롭고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코끝에 닿는 공기엔 아무 냄새도 없었다.
살의 온기나 피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그 안은 완벽히 비어 있었다.
피부는 탄력이 없었고, 손가락은 차가웠다.
눈꺼풀 아래에는 미세한 경련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살아 있음의 시늉’ 에 불과했다.


공기 중에는 묘한 균형이 깃들었다.
무게도, 숨도, 온도도 없는 완전한 정적.
마치 방 안의 모든 것이 호흡을 멈춘 듯했다.
유리관 너머, 연구원의 얼굴이 반사되어 비쳤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고,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록 장치에 마지막 문장이 입력되었다.

“외형 보존. 내부 불명.”


커서가 깜빡였다.
그 순간 연구원 하나가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복도 끝 벽에 등을 기댔다.
하얀 형광등 아래, 그림자 하나가 길게 늘어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결국 이마를 짚었다.
눈가에 손을 대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성공에 다가가고 있는거야.”


그 말은 스스로를 향한 위로처럼 들렸고, 동시에 저주처럼도 들렸다.
그의 등 뒤에서는 여전히 냉각 장치가 돌아가고 있었다.
기계음이 점점 멀어지며, 실험실 안엔 인간의 형체를 한 빈 껍데기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Phase 3 : SUBJ-027 ― 완벽한 인간]

세 번째 대상은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호흡이 일정했고, 표정은 평온했다.
그녀의 앞에 선 연구원들은 이전보다 조용했다.
누군가는 손목의 시계를 만지작거렸고,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모니터의 불빛에 얼굴을 비췄다.


“3단계 진입.”
담담한 음성이 울렸다.
빛의 장이 그녀의 몸을 삼켰다.
온몸이 천천히 줄어들었다.
기계의 눈금이 떨어질 때마다, 실험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숨이 얕아졌다.


모니터의 그래프는 완벽했다.
온도, 혈류, 조직 밀도 — 모든 수치가 기준 안에 있었다.
누군가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성공입니다.”
목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그 순간, 한 모니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신경파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프의 곡선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마침내 한 줄의 평선으로 변했다.

그녀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근육은 반응했고, 체온도 유지됐다.
그러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빛은 들어가지만, 아무것도 반사되지 않았다.
그 눈은 살아 있는 듯, 동시에 완전히 죽어 있었다.

연구원 하나가 입술을 떨며 물었다.
“성공...인가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호흡’이 아니라, 기계의 리듬이었다.


누군가 모니터를 껐다.
실험실 안의 불빛이 조용히 꺼졌다.
유리창에는 연구원의 얼굴이 비쳤다.

눈빛은 비어 있었고, 차가웠다.


[기록 : Success.]

그날 저녁, 보고서가 업로드되었다.
<Phase 3 ― 생리적 구조 완전 복원>
결과란에 체크 표시가 찍혔다.


아무도 그 아래의 작은 주석을 읽지 않았다.
‘의식 반응 미검출’
그 문장은 스크롤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뉴스 : 신인류의 탄생]

다음 날,
화면 속에는 따뜻한 조명이 흘렀다.
CEO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표정은 인자했다.


“그들은 고통을 넘어섰습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불행하지 않습니다.”


박수 소리가 터졌다.
기자들은 사진을 찍었다.

그 순간, 세계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 듯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연구소 지하는 차가웠다.
침대에는 새로운 인류형의 형태만 있었고,
모니터에는 문장이 깜빡였다.

[효율화 과정: 비정상 종료]


한 연구원이 손을 떨며 커서를 움직였다.
그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썼다.
[적응률 99%. 신체 활동 정상.]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캡슐 안의 여자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시스템의 명령이었다.


뉴스에서는 웃음이 흘렀다.
<굿윌 휴먼사이언스 ― 인류의 새로운 세대가 시작됩니다>
그 문장이 스크린을 덮었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정적.


연구소의 불빛이 꺼졌다.
냉각기의 진동만이 미약하게 이어졌다.
그 진동 속에서, 인간의 형체들은 여전히 완벽했다.
단지, 그 속이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

전진인지 후퇴인지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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