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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렁발랑

by 박세신

조명이 꺼졌다.
극장 안이 천천히 어둠으로 채워졌다.
팝콘 봉지들이 한 번, 두 번 바스락거렸다가 멈췄다.
그녀의 손이 내 옆자리를 더듬었다.
팔걸이, 컵 홀더, 공기.
손끝이 스치고 나는 팔을 내리지 않았다.


스크린이 번쩍이고,

사운드가 관객의 귀를 베듯 울렸다.


벌렁.


아직 괴물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한 박자 빨랐다.
커피의 카페인, 낮의 피로, 그리고 그녀의 향이 섞였다.
두근거림이 몸 안에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심장이 물었다.
'이건 공포인가, 기대인가.'


그녀가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결이 내 팔에 닿았다.
벌렁, 발랑.

화면은 어둡고, 공포는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무언가가 시작되어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사람은 낯선 사람과 공포 영화를 보러 가지 않는다.
무서운 장르는 핑계다.
불빛 아래서 고백하긴 부끄럽고,
침묵 속에서 가깝게 앉긴 어색한 이들이
공포라는 명분으로 숨을 나누는 것이다.
벌렁벌렁은 그런 명분의 안쪽에서 자라는 신호다.


괴물이 첫 등장했다.
음향이 폭발하고, 그녀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리고 팔이 내 팔을 찾았다.
짧은 접촉, 짧은 전류.
하지만 그 짧음 안에 모든 것이 있었다.
공포의 벌렁이 아니라,
너와 나의 벌렁이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타이밍을 맞췄다.
두 개의 리듬이 엇갈리다가,
어느 순간 같은 박자로 뛰었다.
나는 그걸 들었다.
내 심장인지 그녀의 심장인지 모를 두근거림이
하나의 박음으로 합쳐지는 소리.


이건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은 늘 말로 시작되지만,
이건 말이 없었다.
이건 리듬의 합의였다.
몸이 먼저 서로를 받아들인 상태.


“진짜 무섭다.”

그녀가 속삭였다.
“그러게.”
내 대답은 공기 속으로 흘러 사라졌다.
하지만 심장은 계속 대답하고 있었다.
벌렁, 벌렁.

대화는 침묵 속에서 진행 중이었다.


화면 속 살인자가 달리고,
배경음이 터지고,
관객이 동시에 숨을 죽일 때,
우리는 같은 간격으로 숨을 쉬었다.
공포의 타이밍이 우리를 조율했다.
몸은 겁에 질린 듯하지만,
사실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클라이맥스에서 그녀는 다시 내 팔을 잡았다.
이번에는 놀란 척조차 하지 않았다.
자연스러웠다.
손가락이 조금 더 안쪽으로,
온기가 조금 더 깊숙이.
벌렁.


심장이 한 번 크게 쿵.
그다음은 발랑.
이젠 구분이 안 된다.
공포가 사랑을 닮았는지,
사랑이 공포를 흉내 내는 건지.


조명이 다시 켜졌다.
우리는 동시에 눈을 찡그렸다.
서로를 보지 못한 척하며 일어섰다.
팝콘이 많이 남았고,
손에는 그녀의 체온이 남았다.

그건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심장이 기억하는 온도였다.


극장 밖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생각보다 안 무섭네.”
우리가 동시에 말했다.
둘 다 거짓말이었다.


걷는 동안에도 심장은 아직 박자를 유지했다.
한쪽이 빨라지면,
다른 쪽이 따라잡았다.
그건 연애의 예고가 아니라,
생존의 리듬이 합쳐진 순간이었다.
사람은 혼자일 때보다,
누군가 옆에 있을 때 더 강하게 살아 있음을 느낀다.
벌렁벌렁은 그 살아 있음의 합창이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눕자
심장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스크린의 잔광,
그녀의 손끝,
그리고 그 순간의 박동.
다 사라졌는데, 아직 남아 있었다.


그때 알았다.
벌렁벌렁은 감정의 이름이 아니라,
두 존재가 동시에 존재했다는 기록이라는 걸.
우리는 공포라는 그림자 안에서
서로의 심박수를 알아챘고,
그건 어떤 말보다 깊은 인사였다.


벌렁.
발랑.

나는 그날의 박자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건 사랑이 되지 않아도 괜찮은 리듬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살아 있는 사람 둘이
서로의 생명으로 박자를 맞춘 유일한 순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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