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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슥

by 박세신

회의가 끝나고 문이 닫힌다.
누군가의 실수가 조용히 공중으로 흩어진다.
“괜찮아요, 저도 그럴 때 많아요.”
말은 부드럽다.
그 말 아래에서 누군가는 얼굴빛을 고쳐 쓴다.
눈썹을 다듬듯이, 표정을 다듬는다.
슥슥.

부끄러움을 닦는 소리, 체면을 다듬는 손의 리듬.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이 완성된다.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감정을 지우지 않는다.
대신 덮는다.
보이지 않게, 깔끔하게.
그걸 사회성이라고 부른다.
어른이 된다는 건
지우개의 모양을 바꾸는 일이다.
이제 지우개는 마음속에 있다.
말끝에서, 웃음 사이에서, 손끝의 슥슥으로만 작동한다.


점심시간, 카페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친다.
눈 밑이 조금 무겁다.
나는 그 위를 손가락으로 살짝 문질러본다.
슥슥.
내 피로와 불만을 얇게 덮는다.
거울 속의 나는 멀쩡하다.
어른의 얼굴이란
감정을 관리하는 하나의 작업물이다.


커피를 마시며 이메일을 쓴다.
‘죄송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놓쳤습니다’
‘앞으로는 더 신경 쓰겠습니다’
문장마다 진심이 조금씩 닳아간다.
타이핑 소리 대신,
내 안에서는 슥슥 소리가 난다.
감정의 표면을 부드럽게 정리하는 소리.
어른의 언어는 늘 수정본이다.
진심은 초안으로 남고,
완성본은 늘 덮여 있다.


저녁, 술자리.
사람들은 각자의 피로를 안주 삼아 웃는다.
“요즘 어때?”
“그럭저럭요.”
정말 그럭저럭일까.
눈웃음이 먼저 나가고, 속마음은 늦게 따라온다.
그 사이에서 생기는 공백을
농담과 웃음으로 슥슥 채운다.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보다
그 채워 넣는 리듬이 더 크다.


어떤 사람은 눈빛으로 감정을 덮고,
어떤 사람은 말로 덮는다.
어른의 대화는 서로의 마음을 교환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관리’하는 일에 가깝다.
정직한 말은 어색하고,
정리된 말만 남는다.
우리는 솔직함을 포장하는 기술을
너무 오래 연습해 버렸다.
그래서 대화가 부드러워질수록
진심은 얇아진다.


밤이 깊어지면 혼자 남는다.
하루 동안 쌓인 '슥슥'이 방 안에 남아 있다.
책상 위엔 미처 보내지 못한 메시지,
삭제된 문장들,
보내려다 멈춘 사과.
나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어른이 된다는 건
‘말하지 않음’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일.
그러나 그 침묵에도 소리가 있다.
슥슥.
마음의 표면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다시 내일의 나를 만든다.


감정은 늘 남는다.
단지, 형태만 달라질 뿐이다.
슬픔은 피곤함으로,
분노는 무표정으로,
외로움은 바쁨으로 옮겨진다.
그 전환의 순간마다
슥슥, 슥—.
이건 어른들이 내는 생활의 리듬이다.


때때로 마음이 너무 지쳐
진짜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사실 나 힘들어요.”
“그 말 듣고 속상했어요.”
하지만 그 말은
목구멍에서 멈춘다.
말은 차가운 유리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져
“괜찮아요.”로 바뀐다.
그 한 마디 안에는 수많은 '슥슥'이 겹쳐 있다.
그렇게 완성된 문장은 깔끔하고,
감정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사실은 더 깊이 눌려 있다.


어른의 슥슥은
감정의 지우개가 아니라
감정의 보관함이다.
당장은 지워진 듯하지만
어느 날, 문득 비슷한 냄새나 목소리에 닿으면
그 보관된 감정이 다시 깨어난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이 상황, 어디서 봤더라?”
그건 예전에 덮었던 감정이
다시 종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접으며 문득 깨닫는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를 끝내는 일이 아니라
끝난 척하는 일이라는 걸.
우리는 매일 같은 손놀림으로
하루를 덮는다.
관계의 실수,
직장의 피로,
사소한 서운함,
말하지 못한 진심.
그 위에 얇은 평온을 깔고
슥슥 문질러 둔다.
그게 사회고, 생존이고, 예의다.


하지만 가끔은
그 슥슥의 리듬이 버거워진다.
웃음을 다듬는 얼굴이 아프고,
괜찮다고 말할수록 가슴이 묵직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혹시 어른들의 슥슥은
감정이 무너지지 않기 위한
최후의 방어막이 아닐까.


이제 나는 안다.
어른의 삶은 완벽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그 안엔 수많은 수정 흔적이 숨어 있다.
보이지 않게 덮고, 덮고,
다시 덮으며 살아간다.
어쩌면 그게 진짜 어른의 품격일지도 모른다.
상처를 보이지 않게 다듬는 기술.
그러나 그 기술 속엔
아직 살아 있는 감정의 잔향이 있다.
손끝에 남은 그 미세한 진동이
우리를 인간으로 남게 한다.


슥—
슥—
오늘도 마음의 표면을 정리하며
나는 내일의 얼굴을 준비한다.
어쩌면 그게
우리 시대의 인사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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