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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삭

by 박세신

아침 공기가 맑다.
거리엔 출근하는 얼굴들이 정갈하다.
밤새 남은 표정의 흔적은 깨끗이 닦였다.
마치 하루의 첫 문장을 새로 써야 하는 사람들처럼,
모두가 표정을 하얗게 지워 온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쓴다.
피곤하지 않은 얼굴, 불만이 없는 목소리, 여유 있어 보이는 태도.
감정의 초고는 늘 새벽에 삭제되고,
사회적 원고는 아침마다 새로 작성된다.
삭삭, 종이 위를 긋는 펜처럼.
세상은 그렇게 매일 새로워진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른은 감정을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정리란 곧, 다시 쓰기의 다른 이름이다.
지워진 마음은 흰 여백이 아니라,
누군가의 발자국을 덮은 새 눈처럼 얇은 층으로 쌓인다.
그 위에 웃음을 쓰고, 침묵을 쓰고,
적당한 예의를 문장처럼 꾹꾹 눌러 담는다.
하루는 그렇게 다듬어진 표정들로 채워진다.


회의실 안에서는 대화가 오가지만,
진짜 의견은 늘 문장 밖에 남는다.
삭삭, 누군가의 말이 매너 있게 수정되고,
다른 누군가의 침묵이 교정된다.
‘괜찮아요’, ‘좋아요’, ‘그렇게 하시죠’ —
그 말들은 문법적으로 완벽하다.
하지만 그 안엔 아무 감정도 없다.
삭삭, 단어의 가장자리가 다듬어질수록
사람의 결도 함께 닳아간다.
오늘의 대화는 깔끔하다.
그리고 완벽하게 비어 있다.


점심 무렵,
카페 유리창에 반사된 얼굴들이 한 줄로 서 있다.
그 표정들은 각자의 감정을 잘 관리하고 있다.
커피의 온도는 적당하고,

대화의 주제는 무해하다.
누군가의 고민은 농담으로 희석되고,
누군가의 불안은 웃음 이모티콘으로 덮인다.
이 도시의 점심시간은 ‘괜찮음’으로 채워진다.
그건 편안함이 아니라, 정리된 감정의 표면이다.
삭삭, 그 표면 위에 다시 말들이 적힌다.
“요즘 어때요?”
“그럭저럭 괜찮아요.”
그 대답은 늘 완벽한 문장이다.
하지만 문장 안에는 언제나 빈칸이 있다.


오후의 공기는 얇고 단정하다.
사람들은 문서의 어조로 대화하고,
감정의 표정을 문장 부호로 관리한다.
웃음은 ‘ㅎㅎ’로, 당혹은 ‘…’으로, 분노는 삭제로.
표현은 다양해졌지만, 마음은 점점 요약된다.
이 시대의 언어는 감정을 담지 않고,
감정을 대신한다.
삭삭,
우리는 매일 마음의 초안을 수정하며 산다.
불편한 구절은 지우고,
아름답게 보이는 문장만 남긴다.
그렇게 완성된 하루는 한 편의 보고서처럼 깔끔하다.


퇴근길의 지하철 안,
사람들은 창문에 비친 얼굴로 자기 문장을 교정한다.
주름, 피로, 무표정.
그 모든 것이 ‘성실’이라는 단어로 치환된다.
피곤한 눈빛 대신 ‘책임감 있는 자세’,
말 없는 퇴근 대신 ‘프로다운 침묵’.
하루의 끝에서조차 우리는 여전히 문장을 다듬고 있다.
마치 잘못된 감정을 그대로 남겨두면,
세상이 문맥을 틀렸다고 지적할 것처럼.
삭삭, 자기검열의 리듬이 귓가에 맴돈다.
감정은 고쳐 쓰이다가 어느새 사라진다.


밤이 되면 책상 위에 일기가 펼쳐진다.
오늘의 문장을 정리하는 시간.
‘억울했다’는 문장은 ‘괜찮았다’로,
‘속상했다’는 문장은 ‘그럴 수도 있지’로 바뀐다.
감정의 진심은 밖으로 밀려나고,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문장만 남는다.
삭제된 말들은 아무 소리 없이 흩어진다.
삭삭,
연필 끝에서 나는 그 마찰음이
오늘의 마음이 사라지는 소리다.
누군가는 그걸 성숙이라 부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감정이 완전히 가려지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책장을 덮으며 생각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감정을 지우고 다시 쓴다.
다정하게, 성숙하게, 무심하게.
세상은 매끄러운 문장을 좋아한다.
비문처럼 거친 감정은 불편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진심을 수정하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단어를 입힌다.
“괜찮아요.”

“다 잘 될 거예요.”
그 말들은 문장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감정의 붕대다.


새벽이 가까워지면,
창문에 반사된 불빛이 희미해진다.
책상 위의 펜이 멈춘다.
삭삭, 마지막 수정이 끝나면
하루의 초고는 완성된다.
그 문장엔 이름이 없고, 서명도 없다.
다만 한 줄의 흔적만 남는다.
‘오늘도 무사히.’


그 문장은 내일의 시작이 된다.
지워진 감정 위에 다시 쓰인 하루.
그 반복이 사람을 다듬고,
다듬어진 마음이 다시 세상을 매끄럽게 만든다.
그리고 그 표면에서,
또다시 그 소리가 들린다.
삭삭.
삭삭.
마음이 스스로를 써 내려가는 소리.
잊기 위해,
다시 살아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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