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가치의 최소 단위
존재의 존재_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존재들의 이야기 - 05화
윤현우 박사는 오랫동안 ‘존재’라는 개념에 대해 연구해왔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했고, 그들의 결론들을 꿰뚫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생각으로 존재를 증명했고, 부버는 타인을 통해 존재를 완성했으며,
사르트르는 시선을 통해 존재를 인식했다.
그러나 그 어떤 철학자도, ‘존재의 최소 단위’ —
감각과 관계, 언어가 모두 사라진 그 경계선에서의 인간을 — 밝히진 못했다.
그는 알고 싶었다.
“감각이 사라져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을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을까?”
그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철학의 언어로는 닿지 못한, 인간의 마지막 실체에 대한 욕망이었다.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작은 흔적은 무엇일까?”
그 질문이 박사의 연구를 시작하게 했다.
1. 연구의 목적:
1) 인간 존재의 '최소 인지 단위‘를 규명한다.
2) 감각이 사라져도 ’나는 존재한다‘는 확신이 남을 수 있는가.
2. 실험 개요:
1) 실험 명: 존재 인지 최소 단위 실험
2) 프로젝트 코드: ECHO
3) 연구 책임자: 윤현우 박사
4) 목적: 모든 감각이 사라진 뒤에도 인간은 스스로를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을까
5) 핵심 가설: 감각은 존재를 인식하는 도구이지만, 존재를 ‘증명’하는 근거는 아니다.
감각이 제거된 상태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6) 실험 방식:
피험자 A-17은 생명유지 장치가 부착된 투명 캡슐 안에 안치된다.
모든 감각은 ‘신경 차단 프로그램 NEMO’ 를 통해 단계적으로 비활성화된다.
1단계: 시각 차단
2단계: 청각 차단
3단계: 잔여 감각 차단
* 실험 2단계 이후 피험자의 뇌파·심박·신경반응은 ‘인지 해석 모듈 ECHO’ 로 실시간 변환되어,
디지털 신호 언어로 해석된다.
** 연구원은 인공 언어 코드로 질문을 송신한다.(단 하나의 질문: “당신은 존재합니까?”)
7) 윤리적 제한: 감각 차단은 일시적이며, 실험 종료 후 복원 가능해야 한다.
단, 피험자의 주관적 시간 인지는 측정 불가하다.
실험 중 “존재의 혼동 상태(Existential Dissonance)”가 발생할 경우 즉시 중단한다.
1단계 — 시각 차단
피험자 A-17은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그 순간, 방 안의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빛은 흐릿해지더니,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시각 차단 완료.”
연구원이 말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無)의 질감이 남았다.
그 어둠은 단순한 암흑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꺼져버린 감각이었다.
박사는 마이크에 대고 물었다.
“당신은 존재합니까?”
피험자의 목소리가 떨리며 돌아왔다.
“네, 존재합니다.”
그의 말에는 약간의 공포와, 동시에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이 ‘있음’의 증거였다.
박사는 메모했다.
‘빛이 사라져도 자아의 형태는 무너지지 않는다. 인간은 아직 자신을 본다.’
2단계 — 청각 차단
“이제 청각을 차단하겠습니다.”
순간, 공기가 사라진 듯한 침묵이 방 안을 덮었다.
모든 음파가 차단되자, 피험자의 호흡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제 박사의 질문은 ECHO 신호로만 그의 뇌에 주입됐다.
‘당신은 존재합니까?’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건 들린 게 아니라, 머릿속에 문장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움직였다.
“네, 존재합니다.”
그 말은 공중에 사라졌다. 남은 것은 말이 만들어지는 감각뿐이었다.
3단계 — 나머지 모든 감각 차단
“이제 마지막 단계입니다.
나머지 모든 감각을 전부 차단합니다.”
차단 신호가 입력되자, 피험자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피부의 전류가 끊기고, 혀와 코의 신경이 마비되었다.
온도도, 냄새도, 방향도, 무게도 사라졌다.
캡슐 안의 인간은 마치 진공 속을 떠도는 점처럼 고요해졌다.
박사는 마지막 질문을 송신했다.
“당신은 존재합니까?”
계기판의 작은 불빛이 깜박였다.
신호가 하나, 둘,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10101010 00001111 10101010]
ECHO가 천천히 문장으로 변환했다.
[전송 내용: “존재합니다. 여긴, 어디죠?”]
박사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기록했다.
'감각을 모두 제거해도, 인간은 여전히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다만, 존재의 방향을 잃는다.'
그때 화면의 신호가 잠시 멈췄다가, 파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단조롭던 신호가 불규칙하게 떨리며, 한 줄의 코드가 천천히 흘렀다.
[전송 내용: "이제 끝난 건가요?"]
이어서 신호가 요동쳤다. 파형이 일그러지며 화면 전체가 붉게 번쩍였다.
["너무 무서워서 중단하고 싶어요."]
박사는 기록하던 손을 멈췄다.
그 문장은 존재의 의지이자, 절규였다.
박사는 다시 마지막 문장을 기록했다.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존재는 지속된다.’
그는 잠시 펜을 든 손을 바라봤다.
문장은 완성됐지만,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들끓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감각이 사라져도 자아는 유지된다는 사실을,
철학서 속에서도, 수많은 논문에서도 수없이 읽어왔다는 걸.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결론이 불만스러웠다.
'지식으로 아는 것'과 '직접 증명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손끝이 떨렸다.
‘조금만 더, 단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내가 그 ‘최초의 확신’을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알아야 했다. 실험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그런데도 손이 멈추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공식 단계 — 고립 실험
박사는 모든 연구원들에게 종료를 선언하고, 철수시켰다. 마무리는 자신이 하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는 실험을 종료할 생각이 없었다.
피험자와 양방향 연결은 끊고, 일방향 신경 모니터링과, 생명유지 장치만 남겼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했다.
“2주 동안,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면, 타인이 사라진 세상에서 존재는 유지될 수 있을까?”
첫째 날, 신호가 미친듯이 날뛰며 붉은 화면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둘째 날, 일정 주기로 잠잠한 파형과 요동치는 파동이 반복됐다.
셋째 날, 피험자는 어떤 반응을 표현하려는 듯 신호를 난발했다.
넷째 날, 뇌파 패턴이 급격히 변했다. 굉장히 잠잠해졌고, 안정됐다.
열흘이 지날 때까지 변하는 상황은 없었다.
그제서야 윤현우 박사는 실험을 종료했다.
그는 하나씩 장치를 해제했다.
모니터가 꺼지고, 공기의 진동이 돌아왔다.
그리고 신경 안정제를 천천히 주입했다.
액체가 투명한 관을 따라 흐르며, 고요가 실험실을 덮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MRI 스캔을 진행하고 나서야, 그가 뇌사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신체 기관은 정상이었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박사는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았다.
그는 떨리는 손끝을 붙잡고 실험 일지에 마지막 문장을 썼다.
최종 기록:
인간은 감각이 사라져도 존재를 증명한다.
본 실험의 명칭을 ‘존재의 최소 단위’가 아닌 ‘존재 가치의 최소 단위’로 정정한다.
타인이 사라지면 ‘존재의 가치’는 소멸한다.
결론: 존재 가치의 최소 단위는 ‘목소리’ — 서로를 인식하는 의사소통의 흔적이다.
박사는 펜을 내려놓았다.
정적이 감돌았다. 그는 허공에 입을 열었다.
“나는 존재합니까?”
그의 목소리는 벽에 부딪혀 흩어졌다.
남은 것은, 아무 대답도 없는 공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