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나를 전시하고, 밤에는 나를 수집한다
요즘은 안부를 묻기도 전에 취향부터 배달되는 시대다.
공유된 재생 목록, 저장된 카페 리스트, 손목 위에 남은 향수의 잔향까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알고리즘이 나를 대신해 말한다. 우리는 서로의 피드를 넘기며 타인의 선호를 들여다보고, 내 것과 겹쳐 보며 안도하거나 미묘하게 비교한다. 취향은 어느새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하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어떤 음악을 들어?”라는 질문은 사실 “너는 어떤 사람이야?”에 더 가깝다. 주말 아침에 고른 빵의 종류와 서점에서 집어 든 책의 제목이 모여, 나라는 사람의 윤곽을 조금씩 선명하게 만든다.
취향이란 뭘까.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라 말하기엔 부족하다. 좋아함은 사적이지만, 취향은 공개된다. 프로필에 적히고, 피드에 올라가고, 해시태그로 정리된다. 마치 나를 소개하는 짧은 문장처럼. 우리는 좋아하는 것에 의미를 덧붙이며, 그 취향이 나를 더 또렷하게 만들어주길 바란다.
흥미로운 건, 그렇게 개인적인 영역마저도 유행의 물결을 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각자 ‘개성’을 말하지만 고개를 들어보면 비슷한 색의 옷과 비슷한 음악이 흐른다. 알고리즘 또한 끊임없이 제안한다. 그 제안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추천 목록이 나를 대신 설명한다. 자유의 영역이라 믿었는데, 어쩌면 가장 빨리 닮아가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다름을 원하면서도, 혼자가 되지 않으려는 모순을 품고 살아간다.
때로 취향은 계산된다. 촌스러워 보이지 않기 위해, 설명하기 편하기 위해.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플레이리스트를 꺼낼 때처럼 우리는 적당히 무난한 선택을 고른다. 그렇다면 취향은 나를 말해주는 걸까, 아니면 내가 속하고 싶은 세계를 말해주는 걸까. 어쩌면 취향은 ‘무엇을 좋아하는가’보다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에 더 가까운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프로필에 오르지 않는 취향이 있다.
이어폰을 타고 흐르는 낡은 유행가, 방 안에서 혼자 몰래 이어 보는 오래된 애니메이션. 누군가에게 설명하려 들면 괜히 어색해지는 것들. 알고리즘이 모르는 취향은 혼자가 된 밤에만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취향은 페이스트리처럼 여러 겹일지 모른다. 세상에 내보내는 외향적인 취향과,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얼굴을 내미는 내향적인 취향.
우리는 오늘도 그 사이를 오가며 음악을 틀고, 옷을 입고, 문장을 고른다.
그렇게 낮에는 나를 전시하고, 밤에는 나를 수집하며 나의 윤곽을 조금씩 더듬어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