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 공간이 확보되었습니다
사진첩을 정리하다 보면 이상하게 시간이 멈춘다. 손가락이 멈추는 쪽은 늘 흐린 사진이다. 초점이 나간 셀카, 흔들린 배경, 음식이 나오기 전 괜히 찍어둔 테이블의 모서리. 찍을 땐 별생각 없던 장면들이 몇 달이 지나면 낯선 얼굴로 돌아온다. ‘이때 왜 이렇게 웃고 있었지?’ 정작 그날의 기분은 흐릿한데, 사진 속 입꼬리만 유난히 선명하다. 기억은 증발하는데 표정만 박제되어 남는다.
사진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같은 바다, 같은 카페, 익숙한 각도. 그중에서 조금 더 나은 한 장을 고른다. 눈이 덜 작아 보이는 것, 턱선이 무너지지 않은 것, 햇빛이 얼굴을 덜 공격하는 사진. 그러고는 묻는다. ‘휴지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확인을 누르면 방금까지 존재하던 찰나가 조용히 사라진다. 활짝 웃는 얼굴은 저장되고, 웃기 직전의 망설임은 가차 없이 지워진다. 선명한 풍경은 남지만 그날의 눅눅한 공기, 미묘하게 엇갈리던 침묵은 사진 밖으로 밀려난다.
가끔은 사진이 기억을 대신해 버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 참 좋았지”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정돈된 표정을 보고 그렇게 믿기로 한 건 아닐까. 우리는 순간을 사는 게 아니라, 나중에 회상하기 좋은 장면을 미리 제작하며 사는 건지도 모른다. 경험을 겪는다기보다 기록을 남길 만한 순간만 골라 수집하는 삶. 그럴듯한 표정은 남고, 짜증과 피곤은 편집된다. 남겨진 장면은 늘 평온하다. 마치 하루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했던 것처럼.
한참을 지우다 보면 스마트폰 상단에 ‘저장 공간이 확보되었습니다’라는 알림이 뜬다. ‘쓸모없는 파일을 정리했습니다.’ 그 문장이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정말 쓸모없는 걸 지운 걸까. 아니면 보기 불편한 장면을 밀어낸 걸까. 며칠의 시간은 몇 장의 이미지로 압축된다. 내가 실제로 겪은 시간이 아니라, 내가 남기기로 한 장면만 기록이 된다.
가끔은 상상한다. 선명한 사진들만 이어 붙이면 내 인생도 그럴듯해 보일까. 안정된 구도와 정돈된 표정만 남기면 나라는 사람도 꽤 단단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자주 흔들리고, 종종 초점이 나가며, 가끔은 구도가 엉망이다. 기억도 사진첩처럼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초점이 어긋난 장면은 삭제하고, 어색한 표정은 휴지통으로 옮긴 뒤 영구 삭제. 물론 인생엔 그런 편리한 기능 따위 없지만.
결국 사진첩에 남은 건 백 장 남짓이다. 수백 장의 시간은 그 안으로 접힌다. 몇 장의 사진이 사라진 수백 장의 시간을 대신한다.
이번에는 일부러 흐릿한 사진도 남겨둔다. 흐릿하고 어설픈 장면까지 언젠가의 나를 증명하는 증거가 될 것 같아서. 조금의 허세와 진심과 피곤함을, 그대로 저장해 둔다.
언젠가 그 사진 앞에서 손이 멈추고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때, 꽤 많이 흔들리고 있었네. 그래도 지우지 않았네.’
저장 공간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완벽하지 않다는 증거가 하나쯤은 남아 있어도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