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까지 기어이 따라온 나
여행 가방을 쌀 때마다 나는 늘 도망치는 기분이 든다.
혹시 몰라 옷 한 벌을 더 쑤셔 넣는 일은,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다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휴식인지 탈출인지 모를 모호한 경계에 서서, 일단 떠난다는 사실 하나에 위안을 얻는다. 이틀 뒤면 다시 돌아와야 할 짧은 여행이라는 건 잠시 잊기로 한다. 그렇게 준비를 서두르다 보면 지도에 저장해 둔 식당, 사람들이 추천한 명소, 사진 포인트까지 일정표는 제법 빼곡해진다.
낯선 도시에 발이 닿는 순간 공기부터 다르게 느껴진다. 익숙한 건물 대신 처음 보는 간판들이 늘어서 있고, 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도 내 일상과는 결이 다르다. 이곳에선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 묘하게 나를 무장해제시킨다. 조금 덜 친절해도 되고, 조금 덜 성실해도 괜찮을 것 같은 일종의 ‘여행자 면죄부’를 받은 기분이다. 카페 창가에 앉아 이름 모를 사람들을 구경하며, 나 역시 그 풍경 속에 슬쩍 섞여 본다.
하지만 풍경이 바뀌어도 끝내 바뀌지 않는 것이 있었다. 애써 낯선 곳에 나를 데려다 놓아도, 그곳에 서 있는 건 결국 어제와 다르지 않은 나였다. 풍경은 달라졌지만 휴대전화 화면을 자꾸만 들여다보는 습관도, 피곤하면 숙소 침대에 냅다 눕는 버릇도 캐리어에 담겨 함께 왔다. 맛집을 찾아둔 지도를 보며 입맛을 다시다가도, 결국 귀찮음을 이기지 못해 배달 음식 앱을 켠다. 화려한 야경을 앞에 두고도 내 시선은 휴대폰 배터리 잔량에 먼저 가 닿았다.
설레면서도 씁쓸한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감각은 또렷해진다. 캐리어 바퀴가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위를 지나며 내는 거친 진동이 “이제 일상이야”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기차 안에서 찍어둔 사진들을 넘겨보지만, 정작 내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무는 건 화려한 풍경보다 숙소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내 모습이다. 그 사진 속 내가 가장 나다워 보여서일까.
집 앞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면 익숙한 집 냄새가 코끝에 먼저 닿으며 묘한 안도감이 밀려온다. 신발을 대충 벗어던지고, 짐이 가득 찬 캐리어를 구석으로 밀어둔 뒤 늘 켜두던 스탠드를 켠다. 방 안의 온기가 몸을 감싸자마자 팽팽했던 긴장이 탁, 하고 풀린다. 그제야 깨닫는다. 여행하는 내내 나는 낯선 공기 속에서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여행은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잠시 먼 길을 돌아와 다시 제자리에 앉았을 때, 내가 여전히 이곳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을 확인하려 떠나는 것일지도.
이 여행의 끝에 거창한 깨달음은 없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될 일상도 떠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돌아와야 할 곳이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확인했을 뿐이다. 뜨거운 물로 여행의 먼지를 씻어내고 어김없이 같은 침대에 눕는다. 어제보다 아주 조금은, 덜 도망치고 싶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