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계절을 기록한다 - 가을

가을 - 그래도 괜찮아

by 빛나는 하루

푸릇푸릇하던 초록잎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옷을 바꿔 입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반팔, 반바지를 입던 사람들은 어느새 긴팔 셔츠와 가디건을 걸치고 있다.


”그래서 내게 있어서 가을은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과 같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손님은 평온하던 내 마음에도 조용히 바람을 일으킨다. 그래서일까, 가을이 되면 항상 어떤 한 주는 어딘가 낯설고 이상하게 흘러간다. 달력은 아직 두 장이나 남았지만 내 마음속 시간은 이미 겨울 가까이 가 있다.


주변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무언가 해내거나 손에 쥔 게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정작 내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진 게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무기력하게 하기도 하고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날엔 괜히 SNS 속 누군가의 웃음조차 멀게 느껴진다. 나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고, 세상은 나를 두고 빠르게 흘러가는 듯하다.


어렸을 땐 낙엽을 밟는 소리만 들어도 괜히 웃음이 났다. 무수히 떨어져 있는 낙엽들 중에서 유독 빨갛게 변한 나뭇잎 하나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동네를 걸어 다니기도 했다. 그 시절엔 계절이 바뀌는 게 그저 신기하고 반가웠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는 그 변화가 왜 이렇게 서늘하게 느껴질까.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편엔 그때의 따뜻함이 남아 있다.


한번 불어 일으킨 추억 한 편은 나를 더욱더 어린 시절 속으로 끌고 갔다.


커다랗게 느껴지던 낡은 학원 건물, 학교가 끝난 뒤 문방구와 놀이터에서 삼삼오오 놀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 그리고 예쁜 노란 잎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거리에 떨어진 은행잎과 그렇지 못한 냄새나는 작은 열매들.


요즘은 문득, 그저 그때 그 시절 속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분명 그때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아졌고 또 마음만 먹으면 혼자 여행도 떠날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순수하고 평온하던 그 시절들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의 난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일을 하느라 너무 바빴던 우리 엄마. 엄마는 직업 특성상 주말에도 일을 하러 나가셨는데 그럴 때마다 난 항상 불만이 가득했다. 다른 아이들은 주말에 엄마랑 같이 손잡고 시내로 놀러 간다는데 나는 주말에도 여전히 엄마의 일이 끝나길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투정을 부리던가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질 순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나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고 있었나 보다. 투정을 부리기보단 엄마의 상황을 아니까 그저 참고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엔 엄마가 드디어 내 손을 잡고 시내에 놀러 갔다. 사람은 많고 복잡해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나도 이제 엄마랑 시내에 놀러 왔다는 사실이 기뻤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는데, 엄마랑 단 둘이 시내를 갔던 몇 없는 기억 속 엄마가 사주셨던 회오리 감자. 그때 당시 회오리 감자가 유행은 했지만 시내에 자주 오지 않았던 나는 그때 처음으로 먹어보았다. 한 손엔 회오리 감자를 들고, 그리고 다른 한 손은 따스한 엄마의 손을 잡고 복잡한 길을 걷던 그날.


그때의 난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내가 어른만 되면-”


만약 나의 삶이 동화 속이라면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어린 시절 속 소망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동화가 아니었고 예외란 없었다.


어른이 된 나는 어렸을 적 소망을 그대로 품은 채 어른이 되었고 오히려 또 다른 현실과 마주할 뿐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이 더 그리운 건지도 모르겠다. 그땐 알지 못했던 진짜 어른들만의 사정, 그리고 진짜 어른의 세계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나.


이런 날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이 사무치게 그립다가도 혼자 훌쩍 조용히 어디론가 떠나고 싶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계속 우울한 법은 없다고, 차츰 우울했던 나의 가을은 어느 순간 조금씩 평온을 찾아간다. 완벽하지 않아도, 아무 이유 없이 울컥해도, 혼자만 뒤처지는 것 같아도, 그저 그 모든 감정을 자연스레 흘려보내는 것. 어쩌면 그것도 가을을 살아가는 나만의 방식이라면 방식일 테니까. 그래서 올해의 가을 속에서 나는 오늘도 작게 속삭인다.


“그래도 괜찮아.”


언젠가는 지금 이 감정들이 솜뭉치처럼 뭉치고 뭉쳐 아주 커다랗게 부푸는 순간이 찾아오면, 나는 지금보다 단단해져 있을 거니까. 그러니 괜찮다고. 조금은 느려져도, 멈춰 있어도, 난 나만의 방식으로 길을 걸어 나가면 되니까. 가을은 그런 걸 허락해 주는 계절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는, 그 계절 안에서 또 한 번 자라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