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자존심
울며불며 전화가 왔다. 수아였다. 윗집인지 아랫집인지 모르겠다며, 밤낮 안 가리고 시끄러워 잠을 계속 설친다고 했다. 아이도 덩달아 잠을 깊게 못 자고 운다고. 남편에게 하소연해 봤자 부산에 내려가자고 했단다. 내 현실도 수아의 현실도, 지옥이 틀림없었다.
“우리 곧 크리스마슨데, 파티할까? 기분 전환 겸 맛있는 것도 먹고.”
“파티? 엄두가 안 난다~ 다른 집 아가들은 잠도 잘 잔다던데~ 어디 데리고 가기가 참 그래~ 집에서는 기분도 안 날 것 같고~”
“우리 카페로 와, 바로 코앞이잖아.”
“언제?”
“아가 컨디션 좋을 때?”
“맞네, 맞아.. 그래도 미리 연락해야지?”
“어차피 겨울이라 사람은 많이 안 걸어 다녀. 웃프다. 사람 많아지면 2층 올라가 있어도 되니까 너무 부담 갖진 말아.”
늘 당차던 수아가 식당도 눈치 보여서 못 간다고 하니, 육아가 만만치 않은 건 겪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앵두 전구부터 찾았다. 장사가 안 돼도 할 건 해야지. 노동요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놓고, 여기저기 소품을 두며 장식하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방문하는 손님에게도 미리 전염시킨 크리스마스다. 웃으며 건네는 한두 마디와 커피 한 잔은 서로에게 따듯한 힐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어디 손님이 그 진상들뿐이겠나. 무례한 손님은 나도 반갑지 않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커플이 찾아왔다. 그녀가 카페 안을 훑었다. 장난감 가게를 구경하듯 눈이 빛났다. 곧이어 남자 친구와 결혼 이야기를 시작했다. 의견이 맞지 않아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나를 2층으로 올려 보냈다. 달콤한 건지, 쌉싸름한 건지. 남 일인 양 냄비에 생수를 붓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물이 보글보글 끓자마자 라면수프를 넣었다. 라면을 넣고 떡국떡을 넣고, 달걀을 넣었다. 잠시 1층으로 내려갔다.
“라면 냄새나.”
“맛있겠다, 배고파.”
추웠던 커플이 봄을 만난 듯 마음이 풀렸다. 웃음꽃도 활짝 피우게 해 볼까? 곧장 2층으로 가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라면은 용기에 담았다. 쟁반에 올리고 나눠 먹을 앞접시와 젓가락을 세팅했다. 김치까지 올려 쟁반을 들고 1층으로 향했다.
“라면 드실래요~? 곧 저녁 시간이라 끓였는데~!”
라면 하나로 감동한 커플은 수줍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는 빠르게 빠져주고 다시 2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가스 불을 켰다. 그날 라면은 만족감이 컸다.
며칠이 지나고 수아가 말없이 찾아왔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나왔다고, 오랜만에 둘만의 수다 타임을 갖기로 했다. 수시로 전화하고, 수시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수아의 표정과 말투가 건조했다. 한 번씩 날 선 표정은 금방이라도 카페를 태울 것 같았다.
“같이 오지 그랬어~” 말을 건네자마자 수아는 시선을 낮추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냉전 중, 자꾸 부산 얘기해. 지금 집 층간 소음이 생각보다 심하거든.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여기 주택 개조해서 살 걸 그랬어.”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걸까, 아니면 빛 좋은 개살구는 현실인 걸까? 나름 원하던 신축이다. 욕심부려 원하는 걸 얻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수아의 모습에, 커피도 쓰고 분위기도 썼다.
까칠해진 피부에 까칠해진 말투, 단순한 스트레스가 아닌 것 같았다.
“커피 더 마실래?”
“응, 네가 알아서 줘.”
“이번엔 진한 카페모카 한 잔씩 마시자.”
“응, 휘핑 빼주고.”
에스프레소 추출을 기다리며 스팀 피쳐에 우유를 담아 적당한 거품이 올라올 때까지 데웠다. 머그잔에 초코 소스와 에스프레소를 담아 섞었다. 그 위로 데워진 우유를 부었다. 마지막엔 코코아 파우더 살짝 뿌려주고 한잔은 내가, 한잔은 수아에게 건넸다.
“망했어.” 혼잣말하듯이 작게 읊조린 수아의 말 한마디는, 카페모카처럼 씁쓸하고 묵직했다.
자존심이 센 탓에 비밀이 많으니 묻지 않았다. 단지, 과한 욕심처럼 보이긴 했어도 수아는 원하던 걸 순조롭게 얻은 줄만 알았다.
“나는 네가 결혼을 전제로 연애한 것도, 실제 결혼해서 임신, 출산, 육아까지 하는 것도, 여전히 믿기지 않아. 워낙 순식간에 진행됐잖아. 나야말로 퇴사하는 게 아니었어. 전 남자 친구가 결혼하잘 때 할 걸 그랬어.”
“넌 스트레스받아서 이혼했을 거야.” 표정 하나 없이 툭, 던진 말에 수아의 얼굴을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너희 엄마도 이혼했잖아.” 연달아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린 수아의 말은, 입에서 다크한 카페모카 향이 아닌 그저 다크한 칼을 꺼낸 것 같았다.
“수아야. 언제부터 우리 집 가정사가 너한테 약점이 된 거야?!” 말벌의 벌집이라도 건드린 듯 쏘아 물었다. 그러나, 수아야말로 이미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우리는 절친답게 서로의 가정사를 아는 만큼 특별했다. 당장 눈앞에서 선을 넘기 전까지. 누가 먼저 선을 넘었을까, 누가 더 심했을까. 그보다 중요한 건, 우리는 이미 틀어진 게 아닐까?
“나가.”
“...” 수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너희 집 가정사 몰라? 몰라서 언급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영하의 날씨만큼이나 추웠다. 감정이 격해져 눈도 입도 쏘아대느라 바빴다. 칼이 날카로울까, 침이 날카로울까.
“네가 먼저 건드렸어!”
“나가! 이왕이면 부산으로.”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찬 바람, 놀란 듯 정신이 번뜩 돌아온 수아였지만, 내 정신은 이미 멀리 떠났다.
“다들 원하잖아. 시댁에서도, 너희 오빠도,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갈 때까지, 수아의 발걸음 소리는 공사 현장 못지않게 바닥을 부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아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연락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