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생각보다 자주 삶의 구조에 대해 물어왔다.
그 질문은 교과서에서 나오지 않고 대부분 자기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친구들에게 아빠가 있다고 거짓말하는 게 힘들어요.”
그 말은 불평이 아니었다. 갖지 못한 것을 나열하려는 태도도 아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자기 이야기를 설명해야 하는 일이 불편하다는 고백이었다.
나는 누군가 자기의 결핍을 말할 때 더 쉽게 무너졌다.
나 역시 나에게 없던 것들을 의식할 때, 설명해야 할 자리에 서 있을 때 자주 주저앉았다.
나는 차마 솔직해도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다.
교실 밖의 세계는 솔직함에 꽤 많은 조건을 달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납득시켜야 하며, 무엇보다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이 사회가 견디기 어려운 이유는 결핍을 죄로 만들기 때문이 아니다.
결핍을 드러내는 순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구조를 오랫동안 키워왔다.
가정의 형태나 보호자의 유무는 아이의 선택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이는 그 상황을 대신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에게 요구되는 것은 적응이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은 개인의 성숙 문제로 치부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배운다.
말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것을.
거짓말은 도덕의 실패가 아니라 환경에 대한 반응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나는 아이의 고백 앞에서 너무 빨리 희망을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잘 자라고 있어”
“너는 강해”
이 말들은 틀리지 않지만 지금 이 질문에는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결국 나는 아이의 질문에 적절한 답을, 아니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주지 못했다.
삶에서 자란 질문에 나는 교과서적인 답변만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후회가 되었다. 이 후회를 달래는 일이 또 쓰는 일밖에 없으므로.
“네가 이렇게 느끼는 이유가 분명히 있고, 그 이유는 네 잘못이 아니야.”
그의 감정이 과장이나 왜곡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아이에게 세상을 견디는 법을 알려줄 수 없었다(알려주고 싶어도 나도 견디는 법을 모르니까) 또 이 견디기 어려운 구조에 대하여 설명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아이는 지금 세상을 고발하려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이 틀리지 않았는지를 묻고 있으니까.
다만 그가 조금 덜 설명해도 되고, 조금 덜 거짓말해도 되는 곳이었으면 한다. 그가 있는 곳이.
그의 질문 앞에 나는 여전히 멈춰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