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쓸모없는 얼굴

마지막 얼굴에게

by 구시안

사랑받기 위해 얼굴을 갖고 있다.

행복하기 위해 얼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동안은 쓸모없는 얼굴을 갖고 있다 해도

괜찮은 얼굴에 미련을 갖지 않기로 한다.


여행하는 달과 함께
고요한 밤을 거닐다 보면
들춰낸 것들 사이로
꽃들이 나의 정원을 밝힌다.


붙잡을 것을 찾으며

헤엄치는 사람들 또한
자신을 건드리기 위해
얼굴을 바꾸며
이 밤을 건너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건드리기 위해
피는 흐르고
얼굴은 색을 얻는다.

머리로 실려 오는 것들은
삶의 필연(必然)과
꿈의 끝을 본다.


손을 오므리고 있다가

가만히 생각하며

눈을 감고

나는 내게 손을 내밀며

불태울 수 있는 보물 하나를 건네준다.


책상의 거울 하나에 비친

얼굴 하나와

기억 하나를

타도록 내버려 둔다.


쓸모없는 얼굴들이 서성이다가

서로 사랑한다 말 못 하고

헤어진 이유에

혹은

믿음을 보냈으나

배신이라는 이름으로

주홍글씨가 새겨진

쓸모없는 얼굴들과 함께

나의 얼굴을 태운다.


후회하지 않는

더 이상

필요도 없는

쓸모없는 얼굴들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확신을 갖고

지워내고

비워내고

재를 남기는 것이다.

나의 기억속에 자리한

나의 수많은 얼굴들도.


골목의 모퉁이에서 해방된 하늘을 잠시 발견하고, 바람의 가시들에 태운 재를 보내며 움직이지 않는 그리고 영원히 기억되지 않을 쓸모없는 얼굴들을 털어낸다. 젊음의 미광(微光)으로 빛나던 그들과 나를 함께 묶어

이제는 늦게 켜지는 램프아래 앉아 있을지도 모르는 그 쓸모없는 얼굴들을 잠시 한 번 더 생각하고 이별한다.


한쪽 눈에는 달을

한쪽 눈에는 해를 달고 사는

한 남자에게는

더 이상 얼굴은 필요가 없다.


지구 둘레를 치장한 사람들의 얼굴은
쓸모 있을지 모르겠으나,

밤이면
내 머리 주위를 맴돌다 잠드는 새처럼,
사랑은 이제

입술 속에서만 웅크리고 있다.


빛나던 얼굴도
점점 빛을 잃어가고,
막을 수 없는 세월 앞에서
나는
미련 없이 얼굴을 감춘다.

허리를 붙잡은 채
쓸모없는 얼굴을
더는 바라보지 않기로 한다.


새벽의 연기 나는 나뭇가지와

바람의 모든 밤의 열매 사이를 지나

휘돌아 사라져 가는

쓸모없는 얼굴들 위로 스치는

마지막 걱정거리를 지나

나는 너무나 쉬운 아름다움을 지녔고

그래서 행복하기도 했으나

불필요한 속도로 미끄러진 뒤

나는

얼굴 대신

감정만을 남겼다.


이제 움직이지 않아

얼음 위에 깔린 비단처럼 곱지도 않고

저 하늘의 구름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부분을 닮아가는 얼굴을 버린다.


나는 늙어가지만

깊은 창문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을 만큼

밤의 내려오는 그림자를

밟지 않고 옆에 두어

쓸모없는 얼굴 옆에 내 눈은

검은 심장을 비껴간다.


가장 벌거벗은 얼굴이

이제는 편안해진 모습으로.

내 혀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고요히 바라보며

얼굴을 가리기 위해

커튼을 내리지 않고

상상하지 못하는 얼굴을

그리지도 않으며

이제는

나의 비밀의 정원에

고요히 자라고 있는

나무에 걸린

심장을 따기만 하면 될 것이다.


패배하고

승리하고

미소와 웃음을 잊었으나

천사처럼 순수했던

하늘을 향해 높이 들던

마지막으로 남고 싶은

얼굴 하나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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