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늘만 무료

세상에 나오는 일은 평등해도, 사는 일은 그렇지 않다

공정의 신화와 삶의 조건들

by 구시안


세상에 나오는 일은 대체로 평등하다.

누구나 울면서 태어나고, 누구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 도착한다. 출생의 순간만큼은 계급도, 언어도, 이력서도 없다. 그러나 그 평등은 오래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거의 즉시 무너진다. 숨을 고르고 첫 울음을 그치는 사이, 어떤 아이는 보호받고 어떤 아이는 방치된다. 같은 시작선이라는 말은 그때부터 이미 은유가 된다.



사는 일은 그래서 공정하지 않다.

노력하면 보상받는다는 문장은 윤리 교과서에는 어울리지만 현실의 복도에서는 자주 미끄러진다. 운을 논하는 자들도 있지만, 그 운은 논하고 싶지 않다. 나는 운을 기대하며 살지 않는 매우 현실적인 종이기 때문이다.



같은 노력을 해도 어떤 사람은 기회를 얻고, 어떤 사람은 기회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이것은 개인의 성실성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구조를 말하기보다 개인의 태도를 점검하는 데 익숙하다. 왜 더 애쓰지 않았는지, 왜 포기했는지, 왜 웃지 못했는지를 묻는다. 질문은 늘 개인을 향하고, 책임도 개인에게 남는다.



인간은 자유롭다는 믿음, 선택할 수 있다는 전제는 우리를 능동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동시에 잔인해진다.

선택할 수 있었다면 실패도 선택의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계는 점점 무죄가 되고, 개인만 유죄가 된다. 사는 일이 힘든 이유는 종종 여기 있다.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삶 전체를 잠식할 때, 사람은 고통보다 죄책감에 먼저 무너진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언제나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한다.

가난, 상실, 차별, 질병. 그들은 공정한 게임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자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한다. 왜냐하면 문학은 삶을 성과로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이겼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견뎠는가이다. 그리고 그 견딤은 언제나 불균등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칼럼의 문체로 계속해서 글을 쓰는 이유는 이것이 개인적인 한탄으로만 남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를 설명하는 언어를 너무 오랫동안 성공의 언어로만 구성해왔다. 능력, 경쟁력, 성장, 효율. 이 단어들은 유용하지만, 삶 전체를 담기에는 너무 날카롭다. 이 언어들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의 삶은 설명되지 않는다.



설명되지 않는 삶은 곧 존중받지 못하는 삶이 된다.

사는 일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타인의 삶 앞에서 함부로 조언하지 않게 만드는 윤리의 출발점이다. “나도 했으니 너도 할 수 있다”는 말은 격려처럼 들리지만, 그 말이 성립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정말로 같은 조건이었는지, 같은 시간과 안전망이 있었는지, 같은 실패를 허락받았는지. 대부분의 경우, 답은 아니오다.



감성은 여기서 중요해진다.

감성은 연약함이 아니라 감지 능력이다. 사는 일이 왜 사람마다 다른 무게로 다가오는지 느낄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사라질 때, 사회는 빠르게 냉소로 기운다. 냉소는 효율적이지만 잔인하다.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하지 않는 사회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 서로를 견디지 못하게 된다.



세상에 나오는 일이 평등하다는 말은 희망의 언어다.

그러나 사는 일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함께 말할 수 있을 때, 그 희망은 현실이 된다. 그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창하지 않다. 비교를 멈추고, 속도를 묻지 않고, 누군가의 삶을 결과로 재단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은 조금 덜 가혹해진다.어쩌면 성숙한 사회란, 모두를 같은 곳으로 데려가는 사회가 아니라 각자가 처한 자리에서 덜 아프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일지도 모른다.



평등은 출발점이 아니라 태도여야 한다. 타인의 삶을 대할 때, 그 불균형을 먼저 고려하는 태도. 그 태도 위에서만 비로소, 우리는 함께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사는 일은 끝내 평등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의 불평등을 외면하지 않는 사회는 가능하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언제나, 조용한 사색과 느린 문장들에서 시작된다.




keyword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brunch membership
구시안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51일째 거주중입니다.

43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83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291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17화우리는 서로를 만나는 대신 서로의 결과를 열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