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붙이기 이전의 삶
이름은 세계가 우리에게 처음 건네는 질문이다.
너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대개 이름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름은 있지만, 이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상태로.
고대 철학에서 이름은 존재의 표식이었다.
플라톤은 이름이 사물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믿었고, 반대로 노자는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름은 드러냄이자 가림이었다. 불리는 순간 분명해지지만, 동시에 그보다 넓은 무엇을 잃는다.
우리는 자라면서 수없이 많은 이름을 얻는다.
자식, 학생, 친구, 직업인, 어른. 그러나 그 이름들이 늘 나를 정확히 가리켰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름이 많아질수록, 나는 자주 이름 없는 상태에 가까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설명은 가능했지만, 이해되지는 않았다.
이름 없음은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남겨진 자리다. 아직 규정되지 않은 상태, 혹은 끝내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방식이다.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이 마음의 바닥에 가라앉을 때, 그것들은 이름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무게로 남는다.
우리는 세계 안에 던져진 채, 의미를 부여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의미는 언제나 사후적이다. 먼저 살아지고, 나중에 이름 붙여진다. 이름 없음은 그 사이의 시간이다. 아직 해석되지 않은 삶의 순간, 아직 문장이 되지 못한 존재.
그래서 이름 없는 것들은 대체로 조용하다.
소리 내어 주장하지 않고, 빛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깊어진다. 마치 물속의 돌처럼, 가라앉으며 자리를 만든다. 떠오르지 않는 대신, 바닥이 된다. 우리는 그 위에 서서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문학은 종종 이 이름 없음에 가장 가까운 언어를 사용한다.
좋은 문장은 설명하지 않고 남겨 둔다. 시는 특히 그렇다. 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끝까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는 제시되지만 완성되지 않고, 독자의 경험 속에서 비로소 이름을 얻는다.
에세이 역시 마찬가지다.
진짜 에세이는 결론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이 지나간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자기 안의 이름 없는 감정과 마주친다. 말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었던 것, 느끼고 있었지만 부르지 않았던 것.
우리는 흔히 이름을 갖는 것이 곧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때로는 반대다. 이름이 없는 채로 남아 있는 것들이야말로, 가장 오래 우리를 지탱한다. 설명되지 않은 슬픔, 정의되지 않은 기쁨, 끝내 말로 옮기지 못한 사랑.
이름 없음은 실패가 아니라, 태도다.
모든 것을 명확히 하지 않겠다는 선택. 쉽게 요약되지 않겠다는 저항. 세상이 요구하는 명명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용기.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끝내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가장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일 것이다. 말로 설명하는 순간 작아지는 것, 불리는 순간 닳아버리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설명되지 않은 마음을 그대로 두고 싶다.
이름을 주지 않고, 방향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내 안에 가라앉게 둔다. 이름 없는 돌처럼.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은 방식으로, 오래 머무르게.
어쩌면 삶이란, 끝내 이름 붙이지 못한 것들을 품고 살아가는 연습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연습이 충분히 깊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이름이 없어도, 우리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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