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는 질문을 단순하게 만드는 데 능숙하다.
무엇을 겪었는지는 묻지 않고, 무엇을 얻었는지를 먼저 확인한다.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어디에 도착했는지만 남는다.
과정은 설명이 되고, 결과는 증거가 된다.
증거가 없는 삶은 곧 설득력이 없는 삶으로 취급된다. 결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늘 요약된다.
숫자와 직함, 성취와 실패의 이분법 속에서 사람은 압축되고, 그 압축된 정보가 전부인 것처럼 유통된다.
우리는 서로를 만나는 대신 서로의 결과를 열람한다.
그 순간부터 이해는 불필요해지고, 비교는 자동화된다. 인간을 존재가 아니라 성과물로 다루는 태도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흔들리고 변형되지만, 성과물은 특정 시점에서 고정된다.
고정된 것은 평가하기 쉽고, 평가하기 쉬운 것은 관리하기 좋다.
그래서 사회는 점점 인간을 이해하기보다 관리하려 든다. 문제는 결과가 언제나 공정하지 않다는 데 있다.
같은 노력을 했다는 전제는 현실에서 거의 성립하지 않는다. 같은 시간, 같은 안전, 같은 실패의 허용치가 주어졌는가를 묻지 않으면서 결과만을 놓고 판단하는 일은 사실상 구조를 은폐하는 가장 세련된 방식이다
불평등은 보이지 않게 되고, 책임은 개인에게 집중된다. 문학은 이 지점을 오래전부터 경계해왔다.
소설 속 인물들은 종종 실패하고, 도착하지 못하고, 끝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채 사라진다. 그럼에도 그 인물들이 독자의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결과보다 밀도로 쓰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흔들렸는가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의 하루. 현실은 다르다. 우리는 서로에게 결과를 요구한다.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살아낸 사람에게조차 “그래서 지금은?”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급한 사회의 무의식적인 폭력이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삶에게 이미 도착한 기준을 들이대는 일. 감성은 이 사회에서 자주 오해된다.
감성은 약함이 아니라 감지 능력인데, 성과 중심의 언어 속에서는 비효율로 분류된다. 타인의 속도를 느끼는 능력, 보이지 않는 무게를 짐작하는 능력은 수치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성은 점점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난다.
공적인 세계는 차갑고, 개인적인 세계만이 따뜻해진다.
우리가 누군가가 쓴 책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이지 않을까를 생각해 본다. 일상은 차갑고 개인적인 시간은 따듯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인간은 완전히 사적인 존재로 살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평가 안에서 숨 쉰다. 그 평가가 결과만을 기준으로 할 때, 사람들은 점점 자신을 숨긴다. 실패를 말하지 않고, 지연을 부끄러워하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결함처럼 여긴다.
그 결과, 사회는 성공담으로 가득 차지만 정작 살아 있는 목소리는 줄어든다.
누군가의 성공담에 귀를 기우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결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상대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책임을 지우자는 것도, 노력을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결과 이전의 시간을 함께 상상하자는 제안이다.
그 사람이 통과해온 조건, 머뭇거림과 멈춤, 설명되지 않는 선택들까지 판단의 문장 안에 잠시 머물게 하자는 것.
어쩌면 윤리란 거창한 정의가 아니라 판단을 늦추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바로 결론 내리지 않는 자세, 결과 뒤에 가려진 시간을 한 번 더 떠올려보는 여백. 그 여백이 있을 때,
사회는 조금 덜 잔인해진다.
결과는 중요하다.
그러나 결과만 중요한 사회는 사람을 너무 빨리 소비한다. 아직 쓰이지 않은 가능성, 말해지지 않은 실패,
조용히 견뎌낸 시간들은 기록되기도 전에 사라진다. 이 메모는 거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제안한다.
다음에 누군가를 평가하려는 순간, 그 사람의 결과 옆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하나 더 적어보자고.
그 작은 상상력이 사회를 바꾸지는 못해도, 적어도 누군가를 덜 다치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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