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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하루

끝나지 않은 문장 위에서 살아가는 마음

by 구시안

사과를 받지 못한 하루는 겉으로 보기엔 다른 날들과 다르지 않다.

해는 뜨고, 사람들은 인사를 나누고, 시간은 약속한 대로 흘러간다. 그러나 그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의 내부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이 하나 남아 있다. 마침표를 받지 못한 문장, 누군가의 말 한마디만 있으면 비로소 과거가 될 수 있었던 문장.



사과를 받지 못한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사건을 떠올리지 않는다.

대신 감정을 떠올린다. 그날의 표정, 그 말투, 그 침묵의 길이. 사과가 없었다는 사실보다 왜 아무 말도 없었는지가 마음을 더 오래 붙잡는다.



심리학에서 사과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하는 행위에 가깝다.

사과는 “그 일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공식적인 선언이며, 상처 입은 사람이 자기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장치다. 사실, 이런 말보다 그냥 상대의 침묵에 피가 마른다는 표현이 정확할 거 같다.



사과가 부재할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향해 질문을 돌린다.

“내가 예민했던 걸까.”

“그 정도 일로 상처받은 내가 문제였을까.”

“굳이 그렇게 느낄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사과를 받지 못한 사람의 하루는 이 질문들과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생각처럼 가볍지 않다.

그것들은 하루의 태도가 되고, 말의 높낮이가 되고,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된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사과는 도덕적 책임의 언어다.

누군가 사과를 한다는 것은 “나는 이 상황의 원인을 당신에게만 맡기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사과를 받지 못한 사람은 혼자서 책임을 떠안는다. 관계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고정된다.



그 하루 동안 그 사람은 유난히 자기감정을 조심스럽게 다룬다.

또다시 과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다시 민폐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슬픔은 줄이고, 분노는 접고, 말은 삼킨다. 사과가 없었던 관계에서

상처 입은 쪽은 늘 더 성숙해지기를 요구받는다.



문학 속에서 사과 없는 관계는 종종 침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 침묵은 전혀 고요하지 않다. 그 안에는 수없이 많은 가정법이 떠다닌다.

“만약 그가 그때 한마디만 했더라면.”

“만약 내가 조금 덜 참았더라면.”

이 가정들은 현재를 잠식하며 하루를 끝내지 못하게 만든다.



사과를 받지 못한 사람의 하루는 자주 반복 재생된다.

그것은 보기 싫은 영화를 계속 봐야만 하는 상황과 흡사하다. 이미 끝난 장면을 마치 다른 결말이 있을 것처럼 되돌려 본다. 이것은 미련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인간의 마음은 이해되지 않은 사건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과를 받지 못한 사람은 타인보다 먼저 스스로에게 사과해야 하는 아이러니에 놓인다.

“그때 그렇게 느낀 건 잘못이 아니었다”라고, “너는 충분히 상처받을 수 있었다”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그 하루는 계속해서 내일로 넘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이 자기 사과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의 말에는 권위를 부여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말에는 의심을 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과를 받지 못한 사람은 늘 마음 어딘가에 미완의 재판을 안고 산다.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고, 사건은 종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루는 흘러간다. 사람은 출근하고, 밥을 먹고, 웃어야 할 순간에는 웃는다. 이 평범함이야말로 사과를 받지 못한 사람의 가장 큰 고충이다.



아무 일도 아닌 얼굴로 아무 일도 아닌 하루를 견뎌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 하루의 끝에서 조용히 하나의 윤리가 생긴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이런 하루를 주지 않겠다는 다짐. 사과를 받지 못한 사람은 사과의 무게를 안다. 그래서 더 쉽게 사과하고, 더 조심스럽게 말하며, 더 늦게 상처를 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사과를 받지 못한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 성숙은 항상 대가를 치른 뒤에 온다. 그 하루, 끝나지 않은 문장을 안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아낸 대가로. 사과를 받지 못한 하루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하루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상처가 될 수도, 윤리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그 하루를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과는 받지 못했지만, 그날의 나는 충분히 존중받아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 문장이 마음속에서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 순간, 사과를 받지 못한 하루는 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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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56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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