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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점은 답이 없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변화에 대하여

by 구시안


사람들은 인생의 전환점을 묻는다.

언제였는지, 무엇이 계기였는지,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묻는다. 마치 문제집의 마지막 문항처럼 정답이 존재해야 할 것처럼 묻는다. 전환점은 설명 가능해야 하고, 이야기로 정리되어야 하며, “그때부터 달라졌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삶 속의 전환점은 대부분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전환점은 답이 없다. 애초에 질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환점은 사건이 아니라 감각에 가깝다.

거창한 결단이나 극적인 단절이 아니라, 어느 날부터 미세하게 달라진 체온 같은 것이다. 같은 길을 걷는데 풍경이 낯설어지고, 같은 말을 듣는데 마음이 덜 흔들리고, 같은 하루를 보내는데 이유 없이 지친다.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먼저 몸에 도착한다. 생각은 그 뒤를 늦게 따라온다. 사람은 이해하기 전에 이미 바뀌어 있다.



심리적으로 전환은 깨달음보다 피로에서 시작된다.

오래 유지해온 태도에 대한 피로, 반복된 역할에 대한 권태, 스스로를 설득해오던 말들에 대한 염증이다. 더 이상 애써 긍정하고 싶지 않은 순간, 버텨왔다는 사실조차 자랑스럽지 않게 느껴질 때, 전환은 조용히 고개를 든다. 그것은 결심이라기보다 허락에 가깝다. 이제는 조금 달라도 괜찮다고, 이제는 다르게 살아도 된다고 자신에게 내리는 늦은 승인이다.



문학 속에서 전환은 늘 불완전한 형태로 나타난다.

주인공은 절대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멈칫하고, 주저하고, 길 위에서 서성인다. 랭보의 문장처럼 전환은 완성되지 않은 문장 속에서 태어난다. 끝나지 않은 생각, 끊긴 감정, 방향을 잃은 시선이 다음 세계의 입구가 된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전환은 확정이 아니라 유예다.

나는 아직 무엇도 아니지만, 더 이상 이전의 나로만 머물 수 없는 상태다. 되돌아갈 수도 없고. 앞에 또 다른 전환점을 예측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전환점에 답을 요구하는 이유는 불안 때문이다.

답이 있다면 삶이 정리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선택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라는 문장은 인생을 이해 가능한 이야기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실제 삶은 그렇게 매끄럽지 않다. 하나의 선택 뒤에는 수많은 망설임과 우연과 실패와 후회가 뒤엉켜 있다.



전환은 직선이 아니라 낙서에 가깝다.

지웠다 그은 선들, 방향을 잃은 흔적들이 겹쳐 생긴 얼룩이다. 우리는 그 얼룩 위에 서서 뒤늦게 의미를 붙인다.



심리학적으로 전환점은 자아가 재배치되는 시기다.

이전의 신념이 더 이상 나를 보호하지 못할 때, 사람은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은 공백을 만들고, 공백은 질문을 낳는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는가. 이 욕망은 정말 내 것인가. 이 피로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그러나 이 질문들은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오래 품을 수 있는 상태 자체가 전환의 징후다. 성급히 결론을 내리지 않는 태도, 모른 채로 머무는 용기가 성숙의 다른 이름이다.



전환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그것은 불이 꺼진 방과 비슷하다. 가구는 그대로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손으로 더듬어야 하고, 천천히 눈이 적응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확신에 기대어 살아왔는지 깨닫는다. 동시에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는지도 알게 된다. 전환은 파괴가 아니라 재배치다. 삶의 가구들이 소리 없이 옮겨지는 밤이다.



문학적으로 말하면 전환점은 절정이 아니라 여백이다.

독자가 숨을 고르는 행간이며, 의미가 잠시 멈춰 있는 공간이다. 그 여백이 있어야 다음 문장이 살아난다. 삶도 마찬가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의 시간이 다음 문장을 준비한다. 그래서 전환은 언제나 사후적으로만 이해된다. 지나온 시간을 문장으로 다시 배열할 수 있을 때, 그제야 “그때가 전환점이었다”라고 말하게 된다.



전환점에 답이 없다는 말은 삶이 무책임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삶이 지나치게 정직하다는 뜻이다. 정직하게 복잡하고, 정직하게 모호하며, 정직하게 느리다. 인간의 내면은 객관식이 아니라 서술형이다. 그리고 그 서술은 끝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환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전환 중인 자신을 견디는 일이다.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변화, 설명되지 않는 불편함, 방향 없는 움직임을 억지로 정리하지 않는 일이다. 답을 쓰지 않아도 되는 여백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일이다. 그 여백 속에서 삶은 스스로 다음 문장을 고른다.



전환점은 문이 아니다. 열고 닫히는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호흡이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리듬이다. 붙잡을 수 없고 기록하기 어렵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이전과는 다른 호흡으로 하루를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전환은 도착이 아니라 진행형이었다는 것을, 답이 아니라 과정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여전히 쓰이고 있는 문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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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59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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