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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것들

마음속에서 먼저 일어난 사건들

by 구시안

나는 내 눈을 벗어 하늘에 던졌다. 푸른 것은 색이 아니라 비명이었다.

도시는 혀를 가지고 밤을 핥고 있었고, 가로등은 술 취한 별처럼 자기 이름을 잊었다. 나는 열여섯 살의 피로 세상을 적셨다. 도덕은 너무 늙어 있었고, 신은 지독히 무기력했다. 내 안에서 꽃이 썩고 썩은 것이 노래했다.

언어는 더 이상 설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련이었고 번개였고 몸을 찢고 나오는 소리였다.

나는 ‘나’가 아니었다 나는 지나가는 바람의 짧은 범죄. 한 번의 감각. 미래는 이미 타버린 종이처럼 손끝에서 부서졌고 시간은 취해 거꾸로 웃었다. 상상은 구원이 아니라 도주였다.


나는 질서를 배신했고 의미를 불태웠으며 감각을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잠시 이 세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상하며 쓰는 글은 참 재미있다.

이런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든다. 이 글을 쓴 사람이 그럴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갖게 할 수 있는 것이 상상이다. 사실 이것이 글의 원천이며 힘이기도 하지만, 과한 상상력은 거짓말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글이라는 것은 재미있다. 글쓰기를 놓지 않는 이유에 하나도 상상 때문이다. 노동을 열심히 하다가 쉬는 시간. 위에 글은 랭보의 단편을 다 읽고, 잠시 랭보를 상상하며 써본 짧은 글이다.



우리는 종종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고, 발걸음이 나아가지 않았으며, 세상에 가시적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인간은 행동하기 이전에 이미 수없이 많은 일을 한다. 그 첫 번째 무대가 바로 상상이다.



상상은 현실의 대체물이 아니라, 현실의 예비 단계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먼저 실패하고, 먼저 성공하고, 먼저 울고, 먼저 웃는다. 아무도 보지 않는 그 은밀한 공간에서 인간은 가장 바쁘게 살아간다. 상상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건들의 배아이며, 아직 말로 나오지 않은 고백의 초안이다.



문학에서 상상은 사람과 시간을 자유롭게 해체한다.

이미 지나간 기억을 다시 불러와 전혀 다른 결말을 부여할 수 있고, 오지 않은 미래를 현재처럼 살아볼 수도 있다. “그때 그렇게 말했더라면”이라는 가정은 후회를 낳지만, 동시에 인간을 성찰하게 만든다. 상상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해석 가능한 이야기로 바꾼다. 화자는 누구를 등장시켜서라도 마음껏 해체할 수 있다. 누구를 죽이거나 살리거나, 혹은 행방불명시킬 수도 있다.



마음속의 생각들은 어떠한 잘못도 아니다.

상상만으로 우리는 살인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으로 옮기느냐 옮기지 않느냐의 차이 그게 사람이며 그것이 상상의 결계선이다. 상상을 상상으로 둘 수 있는 게 얼마나 훌륭한 점인지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입에 담을 수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간다. 이 상상 속에 못할 것은 없다.



상상만으로 두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철학적으로 보면 상상은 인간 자유의 증거다. 우리는 주어진 조건 안에만 갇혀 있지 않다. 현실은 항상 불완전하고, 때로는 잔인하지만, 상상 속에서 우리는 다른 가능성을 실험한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도, 칸트가 순수이성을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지금 여기”를 넘어서는 사유의 힘, 즉 상상 덕분이었다.



심리학에서는 상상이 치유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고통을 그대로 견디기엔 너무 연약하다. 그래서 마음은 상상을 통해 완충 장치를 만든다. 아직 오지 않은 희망을 미리 그려보며 버티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상상 속에서 재방문하며 마음을 달랜다. 상상은 도피가 아니라, 정신의 응급처치다.



흥미로운 것은, 상상이 반드시 긍정적일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불안, 두려움,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려보는 것 역시 상상의 영역이다. 하지만 바로 그 상상 덕분에 우리는 대비하고, 준비하고, 때로는 선택을 바꾼다. 상상은 감정을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정을 이해하게 만든다. “왜 나는 이런 장면을 자꾸 떠올리는가?”라는 질문은 자기 이해의 문을 연다.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을 그리워하고, 이미 떠난 이를 다시 불러와 대화한다. 실제의 사랑이 관계라면, 상상의 사랑은 의미다. 그것은 소유되지 않기에 오히려 더 순수하고, 닿을 수 없기에 더 오래 지속된다.



또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

직접 말하지 못한 사과를 마음속에서 건네고, 듣지 못한 대답을 대신 만들어본다. 현실의 용서는 타인의 선택에 달려 있지만, 상상의 용서는 온전히 나의 선택이다. 그 선택 하나로 마음의 무게가 달라진다.



결국 상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삶의 노동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상상으로 문장을 만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상상으로 하루를 견딘다. 어떤 날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일을 한 날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행동만을 성과로 계산한다.

그러나 상상은 행동 이전의 용기이며, 변화 이전의 질문이다. 오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느낀 날이 있다면, 조용히 물어보자.

“나는 오늘 무엇을 상상했는가?”

그 질문 하나로, 오늘은 이미 헛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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