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존재 자체가 성공이었음을 우리는 잊고 산다
12월 31일, 달력의 마지막 칸은 유난히 조용하다.
달력은 오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숫자들은 흰 종이 위에서 잠든 짐승처럼 숨만 쉰다. 사납던 곰과 맹독을 품고 있던 뱀이 교묘하게 뒤엉켜 동면에 든 것처럼 조용한 방안의 기운이 좋을 뿐이다. 31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소리 없이 접혀 서랍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창밖의 하늘은 한 해 동안 쓰다 남은 잉크처럼 옅고, 번지고, 망설인다. 시간은 떠나지도 머물지도 않은 채 방 한가운데 서 있고, 나는 지워진 날짜들 사이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한 문장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내일은 아직 이름 없는 페이지. 그래서 오늘은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었다.
시계는 여전히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만, 시간은 잠시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인다.
쉬는 날의 도시는 랭보의 시처럼 낯설고 몽롱하다. 익숙한 거리 위에 어제의 내가 아직 남아 있고, 내일의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흐린 햇빛이 방 안에 길게 눕는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발자크가 묘사했을 법한 소시민의 삶이 이 순간만큼은 위엄을 얻는다. 커피가 식는 속도, 먼지가 내려앉는 시간, 생각이 생각을 부르다 멈추는 지점까지 모두가 하나의 풍경이 된다.
이 날은 결산이 아니라 유예다.
잘 산 날과 못 산 날이 잠시 같은 무게로 놓인다. 지나간 시간은 말이 없고, 다가올 시간은 아직 이름이 없다. 그래서 오늘은 다짐하지 않는다. 그저 한 해가 나를 지나갔다는 사실, 내가 여기까지 살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조용한 하루를 쉬면서 보내고 있다.
천상병 시인의 시를 읽어 보면서 생각이 잠기게 되는 모든 것이 선한 기운으로 맴도는 것을 보면, 시인이 가진 힘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하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문학에서 좀처럼 쓰이지 않는 이 단어가 그의 이름 앞에서는 이상하지 않다. 천상병 시인. 착하다는 말. 그의 시를 읽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착해진다.
천상병 시인을 생각하면 먼저 ‘착하다’는 말이 떠오른다니. 내 머릿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 걸까.
내가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착하다는 말은 이런 분에게 써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용히 물들어가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마지막 31일의 하루. 천상병 시인과 발자크. 그리고 쿤데라의 이야기 속에 하루 종일 파묻어 있다가 샌드위치와 디저트. 차가운 커피 하나를 시켰다.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천상병 시인의 사진 속 얼굴과 그가 쓴 시들이 맴돌고 있다.
그는 세상을 날카롭게 해부하거나, 삶을 웅변적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살았고, 아팠고, 견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것이 그의 시였고 그의 생애였다.
그의 삶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가난했고, 병들었고, 시대는 그를 함부로 다루었다. 고문과 정신병원, 끊임없는 결핍 속에서도 그는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이라는 문장을 남겼다. 그 문장은 체념이 아니라 용서에 가까웠다. 살면서 받은 상처보다 살아 있게 해 준 것들이 더 많았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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