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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실명

눈은 열려 있었고, 진실은 닫혀 있었다

by 구시안

가짜실명(實名).


어느 마을의 오후는 늘 정직한 척했다. 햇빛은 무고했고, 나무 그림자는 사람들의 말보다 더 곧았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곳에서 진짜 이름을 가진 것은 거의 없다는 걸. 우리는 서로를 부르기 위해 단어를 만들었지만, 그 단어들은 늘 조금씩 비켜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가짜실명이라 불렀다.


가짜실명은 얼굴에 붙은 라벨 같은 것이다. 웃음에 매달린 친절, 침묵에 포장된 정의, 예의라는 이름의 두려움. 어른들은 그것을 성숙이라 불렀고, 아이들은 그냥 숨 막힘으로 느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자라며 세상을 관찰하는 법을 배웠다. 말보다 틈을, 주장보다 떨림을 보는 방식으로.


어떤 사람은 착하다고 불렸고, 어떤 사람은 문제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 분류는 바람처럼 바뀌었다. 하루는 미담이 되고, 하루는 소문이 되었다. 진실은 늘 뒤뜰에 놓여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으려는 곳,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는 장소. 나는 그곳을 마음속 기록장에 적어두었다. 잉크 대신 기억으로.


새로운 단어들이 필요했다.

시선죄책(視線罪責) -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발생하는 책임.

이상괴리(理想乖離) - 배운 이상과 현실이 어긋나며 생기는 균열.

무언정직(無言正直) -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태도와 진실이 더 또렷해지는 상태.


나는 그 단어들로 세상을 다시 읽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입체가 되었고, 선과 악은 한 줄에 서지 않았다. 아이였던 나는 판단하지 않으려 애썼다. 대신 이해하려고 했다. 이해는 용서와 다르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가짜실명은 여전히 우리를 덮고 있다. 편리하고 안전해서 쉽게 벗기 어렵다. 하지만 가끔, 누군가가 진짜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 온다. 그건 소리보다 감각에 가깝다. 숨이 잠시 멎고, 마음이 똑바로 선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도 사람도 가짜가 아니다.




가짜실명(失明).


이 마을에는 눈이 멀지 않은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병원에 간 사람도 없었고, 붕대를 한 사람도 없었지만, 모두가 필요한 순간마다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가짜실명이라 불렀다. 보지 않기로 선택한 눈, 알아차리지 않기로 합의된 시선의 결핍.


아이였던 나는 이상하다고 느꼈다. 어른들은 모든 것을 본다고 말했지만, 정작 중요한 장면에서는 늘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부당하게 혼나는 순간, 누군가의 슬픔이 웃음으로 덮이는 순간, 정의가 불편해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들의 눈은 흐릿해졌다. 마치 햇빛이 너무 강하면 눈을 찡그리듯이.


가짜실명은 전염성이 있었다. 한 사람이 못 본 척하면, 다른 사람도 덜 보게 되었다. 그렇게 마을은 집단적으로 시력을 낮췄다. 이를 나는 도덕근시라고 불렀다. 가까운 체면은 선명하게 보면서, 멀리 있는 고통은 흐리게 만드는 병.


어른들은 말했다. “세상은 원래 그래.”
그 문장은 시선면책처럼 작동했다. 본 것을 못 본 것으로 바꾸는 주문. 하지만 아이의 눈에는 그 말 뒤에 남은 공백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침묵의 모양, 회피의 윤곽,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혼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

나는 배웠다. 진짜 실명은 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라는 걸. 볼 수 없는 게 아니라, 보면 책임이 생기기 때문에 피하는 것. 그 책임이 너무 무거워서, 차라리 어둠을 선택하는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가짜실명은 정상처럼 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본다. 보아버린다. 숨길 줄 모르기 때문에, 선택적으로 눈을 감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를 불편해한다. 아이의 시선은 너무 정직해서, 가짜실명을 들춰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그 마을을 기억한다. 모두가 잘 보인다고 말했지만, 정작 아무도 제대로 보지 않았던 곳. 그리고 나는 다짐했다. 완전히 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보지 않는 척은 하지 말자고. 그게 내가 가짜실명에 맞서 배운 유일한 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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