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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된 마음과 사물의 느린 기록

by 구시안

녹은 울지 않는다. 대신 표면을 바꾼다. 소리 없이 색을 바꾸고, 손대지 않았다는 변명을 천천히 무너뜨린다. 처음에는 점처럼 시작된다. 아무도 이름 붙이지 않는 얼룩. 그다음에는 선이 되고, 마침내 문장이 된다. 금속 위에 쓰인 느린 문장. 읽지 않아도 이미 몸에 닿아 있는 문장. 그 문장 속의 단어는 '녹'이다.


안개 낀 섬에서는 모든 것이 반쯤만 보인다. 바다는 섬을 감싸고 있지만, 보호인지 감금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다. 섬의 철문은 닫혀 있고, 닫혀 있기 때문에 풍경이 된다. 풍경이 된 문은 더 이상 열릴 필요가 없다. 열리지 않음이 기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위에 녹이 핀다. 녹은 잠금장치가 아니라, 망각의 장식처럼 번진다.


표면은 언제나 먼저 말을 한다. 내부보다 빠르게, 진심보다 정직하게. 손으로 만지면 가루가 묻고, 눈으로 보면 시간이 보인다. 눈, 코, 입이 있는 얼굴들도 그렇다. 얼굴은 가장 취약한 표면이다. 너무 오래 침묵한 얼굴은 표정 대신 무늬를 갖는다. 웃음이 지워진 자리에 남은 것은 공백이 아니라, 굳은 습관이다.


빛이 지나간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빛. 정오를 닮은 빛. 너무 분명해서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 모든 것이 평평해진다. 평평해진 세계에서는 잘못된 것과 오래된 것이 구별되지 않는다. 녹은 그 평평함을 사랑한다. 튀어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질문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녹지 않은 눈이 있다. 눈은 순수하지 않다. 눈은 단지 차갑게 남아 있을 뿐이다. 녹지 않은 기억처럼. 해동되지 않은 장면처럼. 그것은 보존이 아니라 지연이다. 녹지 않음은 기다림이 아니라, 중단이다. 그 위를 사람들이 걷는다. 발자국은 남지만, 책임은 남지 않는다.


명령은 사라진다. 그러나 획순은 남는다. 먼저 내려오고, 나중에 가로지르는 방식. 생각보다 손이 먼저 기억하는 질서. 그 질서 위에 외투를 입는다. 외투는 보호하지만 동시에 거리를 만든다. 몸은 감싸지만, 체온은 숨긴다. 봉인된 마음은 안전해 보이지만, 안전하다는 이유로 더 오래 방치된다.


유리창이 있다. 투명한 벽. 안과 밖을 가르면서 동시에 연결하는 얇은 폭력. 안에서 보는 사람은 안전하고, 밖에서 보이는 사람은 설명이 된다. 설명은 인간을 사물로 만든다. 사물이 되면 녹슬어도 된다. 관리되지 않아도, 오래되어도, 그냥 그런 것으로 남아도 된다.


녹은 꽃처럼 번진다. 피어날 의지가 없기 때문에 더 정확하다. 누가 키우지 않아도 자라고, 누가 미워하지 않아도 퍼진다.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말 대신 표면이 말을 한다. 철문이, 얼굴이, 창백한 손잡이가 대신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노후라고 부르고, 시간 탓으로 밀어둔다.


그러나 녹은 시간이 아니다. 녹은 태도다. 닦지 않기로 한 손, 보지 않기로 한 눈, 말하지 않기로 한 입이 남긴 결과다. 녹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지금도 번지고 있고, 지금도 색을 바꾸고 있다.


이 글은 녹을 제거 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가까이 가져온다. 손에 묻히고, 냄새를 맡고, 떨어지는 가루를 본다. 녹은 숨기면 구조가 되고, 이름 붙이면 질문이 된다. 질문은 불편하지만, 불편함은 아직 감각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완전한 침묵은 아니라는 뜻이다. 표면은 말하고 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읽히기를 기다리며.




녹슨 것들은 한 번에 생기지 않는다. 그것들은 늘 거기 있었고, 다만 천천히 시간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손이 자주 닿지 않던 난간, 매일 지나쳤지만 멈춰 본 적 없는 문고리, 말이 닿지 않은 마음의 가장자리처럼. 녹은 사건이 아니라 축적이다. 한 번도 결정되지 않았던 순간들이 겹쳐서 만들어낸 색이다.


아침과 저녁 사이, 가장 애매한 시간에 녹은 잘 드러난다. 빛이 너무 강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을 때. 사물은 그때 가장 솔직해진다. 매끈하다고 믿었던 표면이 사실은 울퉁불퉁했다는 것, 오래 버틴 것이 아니라 오래 방치되었다는 것. 녹슨 것들은 변명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아무도 불리지 않았는지를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처음에는 작은 점이다. 대수롭지 않게 넘긴 말, 묻지 않은 질문, 이해한 척한 침묵. 그 점은 선이 되고, 어느 날 문장처럼 이어진다. 말하지 않았던 이유들, 참았던 감정들,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반복한 문장들이 서로를 붙잡고 굳는다. 그렇게 마음도 녹슨다. 부서지지 않아서,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


녹슨 것들은 소리가 없다. 울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자주 미화된다. 오래된 것, 사연 있는 것, 견뎌온 것. 그러나 견딘 것과 방치된 것은 다르다. 견딤에는 의지가 있지만, 녹에는 무관심이 있다.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장 정확한 설명이다.


강가에 놓인 철제 의자는 아직 의자다. 앉을 수 있고, 버틸 수 있다. 그러나 그 위에 앉는 순간, 옷에 묻는 갈색 가루는 시간을 증명한다. 과거가 현재로 옮겨 붙는 순간이다. 녹슨 것들은 늘 그렇게 현재를 더럽힌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도 녹슨다. 잊히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같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기억은 점점 단단해지고, 나중에는 꺼내기 어려운 덩어리가 된다. 그 덩어리는 말이 되지 못한 채, 행동으로만 드러난다. 망설임, 회피, 이유 없는 피로. 녹슨 기억은 그렇게 몸을 통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슨 것들에는 묘한 온기가 있다. 완전히 차갑지 않기 때문이다. 햇빛을 받으면 금속보다 먼저 데워지고, 손을 대면 거칠게 반응한다. 아직 반응한다는 사실, 그것이 녹슨 것들이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다. 닦을 수 있다는 가능성, 혹은 최소한 마주할 수 있다는 가능성.


녹슨 것들은 우리에게 묻지 않는다. 대신 기다린다. 언제쯤 손을 뻗을 것인지, 언제쯤 이름을 부를 것인지. 그것이 물건이든, 마음이든, 관계든. 녹은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시선을 요구한다.


어쩌면 삶은 녹슨 것들을 지나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새것만을 선택하지 않고, 반짝임만을 신뢰하지 않으며, 남아 있는 흔적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통과하는 일. 녹슨 것들은 말한다. 우리는 여전히 여기 있다고.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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