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땅

정복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에서

by 구시안

아무 조건 없이 내가 되고 싶어
내면을 건드렸다.


아주 조금씩 살아가며
혼자만의 시간이 올 때마다
그 내면의 땅을 정복하기 위한
작은 발걸음을 이어갔다.


평평할 거라 믿었던 이 땅에는
깊은 늪이 있었고
헐떡이게 만드는 고개가 있었으며
시름과 권태가 합창을 하듯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혼란과 후회의 땅이 들썩이는 밤,
잠시 써 내려간 글 덕분에
나는 잠시나마 시름을 잊으려 한다.


충분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이 글이 비참함으로 향하는 사색을 기록할지라도

그조차 나를 규정하지 않기를 바라며

영향받지 않는 나를 찾기 위해

나는 이 밤의 길을 걷는다.


그 길은

쓸모도 없고
진실성도 없으며
혼란스러웠다가
끝내 첫차를 기다리는 플랫폼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상태가 된다.


한정된 인생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어제 내가 무엇을 말했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글을 쓸 수 있는 잠깐의 시간에

모두 쏟아내고
잊자.


단어의 소리와 의미가
내면에서 공명하고,
혼잣말의 음색과
보이지 않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


현실은
호수 같은 고요를 원하지만,
내면은 여전히 터무니없이 넓어
아직 밟지 못한 영토를

계속해서 넓혀간다.

그 끝은
과연 있는 것일까.




담벼락 위에서
길고양이가 나를 바라본다.
매서운 눈빛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고백 하나를
나에게 대신 쏟아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이 쓴 문장과 문장 사이,
간신히 이어진 다리 위에 서 있었다.
숲이 품은 희망과
화려한 문장의 빛에 눈이 부셔
결국 책을 덮는다.


이 야밤에
골목을 채울 북소리는 없고,
집이 없는
혹은 집은 없어도
자기만의 방공호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고양이 한 마주와 마주한다.


내면의 땅이
초록 들판일 것이라 믿었던 착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진다.


환상이 끝나고,
미뤄두었던 개간이 늦어질수록
쇠약해진 영토 위에
남은 것은
어둠뿐이었다.




내면의 땅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다.

지나온 길을 표시하기 위해 글로 기록할 뿐이다.

그래서 누구도 정확히 어디까지가

내 것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발을 들여놓고 나서야
아, 여기가 아직 나는구나,
아니면 이미 나를 떠났구나를
늦게 알아차릴 뿐이다.


나는 종종 이 땅에서
삽도 없이 구덩이를 팠고
물도 없이 불을 피웠다.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생각은 늘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여기서는
의욕이 먼저 썩는다.
계획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의미는 자주 탈진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도망치지 못한다.


도망치면 더 비참해질 것 같아서가 아니라
갈 데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너 자신을 믿어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면의 땅에서는
자기 자신이 가장 믿기 어려운 존재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를 배신하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팔아먹을 준비를 한다.
그래도 우리는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이미 너무 많은 약속이 찢겨 나갔으니까.


밤이 깊어질수록

이 땅은 말을 건다.
대부분은 쓸데없는 이야기다.


왜 그때 그렇게 말했는지,

왜 그 사람에게서 눈을 피했는지,
왜 끝내 붙잡지 않았는지.
답이 없는 질문들이
풀벌레처럼 운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한다.
대신 문장을 마신다.
취하지도 않고
깨지도 않는 상태로
계속 앉아 있는 법을 배웠다.

이건 치유도 아니고
구원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내가 아직 여기에 있다는
확인에 가깝다.


내면의 땅에는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는다.
여기서 살아남아도
아무런 보상이 없다.


오히려
밖에서 쓰일 수 있는 에너지를
안으로 다 써버렸다는 이유로

게으르다는 소리를 듣기 쉽다.

그래도
이 땅을 완전히 버릴 수 없는 건
가끔 아주 가끔
말도 안 되게 솔직한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꾸미지 않은 문장 하나,
변명 없는 생각 하나가
갑자기 서 있다.


그건 돈도 안 되고
설명도 안 되지만
이상하게
살아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양이는 여전히 담벼락 위에 있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눈으로
나를 본다.
부러움도 없고
연민도 없다.
그 시선 앞에서는
잘 살고 있는 척도
망가진 척도
의미가 없다.


내면의 땅은
결국 초록이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한 폐허도 아니었다.
풀 대신 먼지가 있었고
꽃 대신 침묵이 있었지만
적어도
도망치지 않은 발자국은 남아 있었다.


아마 나는
이 땅을 끝까지 정복하지 못할 것이다.
개간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여기는 성취의 땅이 아니라
머무름의 땅이니까.


오늘도 나는
아무 조건 없이 내가 되고 싶어서
이곳에 앉아 있다.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 정도면
이 밤에서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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