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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구석

나를 흩어놓는 느린 자리

by 구시안

시간의 구석에서

너울을 벗어난 파도가

잔잔하게 밀려와

손 한 뺨 정도의 폭을 적셔

거친 숨을 쉬던 일상에 쪼그려 앉았다.


반차의 묘미.

경계에서

날개의 시간을 갖게 되는

시간의 구석에서

빛의 끈들이 나를

감염시키게 둔다.


손에 잡히는 책 한 권에 마음을 뺏기고

밝았다가 흐려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바람에서 느껴지는 비를 예감해 보며

나를

나처럼 태어난 사람을

누구의 손을 붙잡지 않고 앉아

내 시간 속으로 던진다.


거슬러 말해진 이름들을 갖고 사는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과

내 무게만큼만 새벽에 지평선에 주기 위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낮에 열어두웠던 분화구를 닫는다.


시간을 전복시키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

시간의 구석에서 자리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우쳐가며

밤의 흰 풀 위에서

익사한 나무 아래서도

녹음과 새들을 기대하지 않는다.


눈의 층계가 생기고

책을 덮고 나서

커피를 내리고 앉아

존재하지 않는 휴식에 휘말려 있으면서도, 내가 가진 층계 중 하나가 구름에 가려진다. 창 밖으로 펼쳐진 나무들에 미동도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생각의 계단들을 지나 시간의 구석에 자리하여 가벼운 우윳빛 속으로 육체를 담근다.


나는 언제나 시간의 중심이 아니라 그 가장자리에서 살고 있다고 느낀다. 중심에서는 모든 것이 또렷하게 정의되고, 사건들은 서로를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내가 머무는 곳은 그렇지 않다. 이곳은 늘 조금 늦게 도착한 생각들과, 이미 지나가버린 감정들의 잔향으로 가득 차 있다.


시간은 내게 직선이 아니라 낡은 방의 구석처럼 느껴진다. 먼지가 쌓이고, 누구도 일부러 찾지 않는 자리.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곳에 앉아 있으면 세상의 모든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린다. 나는 지나간 어제의 발자국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숨결을 동시에 듣는다. 그것들은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도, 같은 공기를 공유한다.


나는 종종 나 자신이 하나의 사람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로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나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어떤 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다. 이름 없는 상태로, 목적 없는 기다림 속에서.


이 기다림은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조용한 안락함에 가깝다. 마치 아무도 오지 않는 기차역에서 마지막 열차를 기다리는 기분과도 같다. 나는 그 열차가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떠날 준비를 하지 않는다. 떠남보다 머무름이 더 진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간의 구석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른다. 아니, 어쩌면 흐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안에서 나를 잊고, 동시에 더 또렷하게 기억한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단지, 이 애매한 위치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존재감뿐이다.


나는 중심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중심은 너무 밝아서, 나를 하나의 형태로 고정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고정되기를 거부한다. 나는 흐릿한 채로, 정의되지 않은 채로 남고 싶다. 그것이 내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구석에 앉아 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순간을 바라보며, 아무도 기록하지 않을 감정을 붙잡고.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나를 흩어놓는 느린 자리.

시간의 구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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