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02: 겐트 - 우연의 위로

가장 따뜻한 위로는 계획이 아닌 ‘우연’의 얼굴로 온다

by JP 정표

시간이 살아 숨 쉬는 도시

그래서, 유럽에 가면 저녁이 있습니까?를 읽은 분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우리 가족이 벨기에에 도착해 가장 처음 ‘나들이’라는 이름으로 향했던 도시.
바로 겐트(Ghent)다.


테르뷔렌(Tervuren)에 막 정착해
공기마저 낯설던 시절이었다.
“우리도 이제 한 번 나들이를 해보자”라며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비장하게 길을 나섰다

.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도착한 그곳에서
우리가 점심으로 선택한 메뉴는
놀랍게도 떡볶이였다.


유럽의 고도(古都) 한복판에서 만난
매콤한 떡볶이 한 접시.
그 붉은 소스가 가져다준 안도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긴장이 풀리고, 배가 든든해지고 나서야
눈앞의 도시가 비로소 ‘풍경’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내게 겐트는,
벨기에의 아름다움을 가장 먼저 새겨준
떡볶이 국물처럼 진하고 애틋한 도시다.


1. 박제된 시간 vs 살아있는 시간

벨기에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사람들은 흔히 브뤼헤(Brugge)를 떠올린다.
물론 아름답다.

하지만 그곳은 마치 정교하게 관리된
거대한 ‘박물관 세트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겐트는
중세가 현재와 함께 숨 쉬는 도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에는 관광객 외에 생활인도 많기 때문이다.


도시 한가운데엔
벨기에 명문 겐트대학교(Ghent University)가 자리하고,
옛 건물 사이로 자전거를 타는 학생들,
강가 계단에서 맥주를 마시는 청년들이
낡은 벽돌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는다.


흥미로운 점은,
겐트대학교가 한국 인천 송도에도
글로벌 캠퍼스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내가 살던 벨기에와 언젠가 돌아갈 한국이
‘대학’이라는 매개로 연결된다는 사실.


귀국 전 마지막 봄,
그 교집합을 곱씹으며
학교 근처를 일부러 다시 거닐기도 했다.


2. 엔지니어의 눈으로 본 15세기의 ‘하이테크’

겐트에는 유럽 여행자가 기대하는 문법들이 다 있다.

도시 한복판의 위압적인 백작의 성(Gravensteen),
운하를 따라 흐르는 보트 투어의 낭만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성 바프 대성당(St. Bavo’s Cathedral)에 있는
얀 반 에이크 형제의 걸작,
<신비로운 어린양 경배〉였다.


그 앞에 섰을 때
나는 미학적 감동보다 먼저
기술적 충격을 받았다.


15세기에 유화 물감으로
이 정도의 극사실적 디테일을 구현했다는 것.
붓질 하나하나에 담긴 집요함은
식각(Etch) 공정을 다루는 엔지니어의 눈으로 봐도
경이로운 수준의 하이테크였다.


예술은 때로
가장 고도화된 기술의 얼굴을 하고 있다.



3. 야경이 아니라 ‘분위기’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나를 가장 깊게 사로잡은 건
웅장한 성도, 정교한 그림도 아니었다.
바로 ‘분위기’였다.


겐트는 도시 전체의 조도(照度)를 설계하는
‘라이트 플랜(Lighting Plan)’으로
빛을 다루는 기술로 국제적인 상까지 받은 도시다.


해가 지면
수백 년 된 길드하우스의 외벽은
부드러운 오렌지빛 조명을 머금고,
그 잔상은 레이어(Leie) 강 위로
데칼코마니처럼 내려앉는다.


이건 단순한 ‘야경(Night view)’이 아니다.
치밀하게 설계된 분위기(Mood)다.


어둠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각도와 온도를 조율해
도시의 표정을 바꾸는 기술.


그 강물 위에서
나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저녁이 있는 삶’의 실체를 본 듯했다.


그것은
퇴근 시간이 보장되는 삶이 아니라,
하루의 끝에서 풍경을 음미할 수 있는 여유,
바로 그 순간을 온전히 누리는 감각이었다.



브뤼헤가 보존된 ‘정물화’라면,
겐트는 오늘도 맥박이 뛰는 ‘일상의 풍경화’다.


그래서, 나는 겐트다.
첫나들이의 설렘(떡볶이)이었고,
살아있는 대학 도시의 활기였으며,
빛으로 빚은 저녁의 감각을 가르쳐준 도시.


다음 편에서는
내가 정의한 정물화의 도시,
브뤼헤(Brugge) 이야기로 넘어간다.


JP 정표 - Etch the life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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