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03: 브뤼헤 - 멈춤의 도시

고요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멈춰야 들리는 마음의 소리

by JP 정표

지난 겐트(Ghent)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 브뤼헤(Brugge)다.

겐트가 삶이 흐르는 ‘일상의 풍경화’였다면,
브뤼헤는 완벽하게 구도가 잡힌 한 폭의 ‘정물화’다.


겐트가 나에게 ‘저녁이 있는 삶’의 분위기를 선물했다면,
브뤼헤는 ‘완벽한 중세’라는 시간을 건네주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운하를 따라 늘어선 수백 년 된 건물들은
캔버스 위의 물감처럼 정교하게 자리하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보트는
현실의 속도와는 무관하게 유유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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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걷는 딸아이의 뒷모습 너머로 펼쳐진 풍경.
잘 만든 시대극 세트장 한가운데 뚝 떨어진 듯한,
묘한 비현실감이 나를 천천히 감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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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물화 속에 숨겨진 생명력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벨포트(Belfort) 종탑
브뤼헤의 중심축이자 상징이다.
그 아래 마르크트 광장은 관광객들로 붐볐지만,
그 소란스러움마저 이 도시의 ‘정물화’ 속에
하나의 오브제로 고요히 배치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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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물화라고 해서 생명이 없는 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도 디테일한 숨결이 있다.


운하 한편에서 둥지를 튼 백조 가족,
도시 외곽에서 바람을 맞으며 돌아가는 풍차,
길가의 작고 이름 없는 꽃들,
그리고 마차를 끄는 말의 거친 숨소리.


이 작은 움직임들이
완벽해 보이는 풍경 속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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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떡볶이의 안도감 vs 와플의 여유

겐트에서의 첫 끼니가
낯선 땅에서 ‘생존 확인’을 해주는 떡볶이였다면,
브뤼헤에서의 기억은
‘여유’ 그 자체였던 와플과 커피다.


따끈하게 구워낸 브뤼셀 와플 위에
씹을수록 달콤한 딸기와 크림,
그리고 쌉싸름한 아메리카노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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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저녁이 있는 삶’은
사실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런 ‘오후의 완벽한 게으름’을
죄책감 없이 누릴 수 있는 순간,
그 자체가 저녁일지도.


그리고, 시선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던
벨기에 맥주 상점들은
이 도시가 여행자에게 선물하는
달콤한 특권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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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tch(깎아냄)를 멈추고, 보존된 시간을 걷다

겐트와 브뤼헤.
지리적으로는 아주 가깝지만
그 결은 놀라울 만큼 다르다.


겐트가 학생들의 활기와
삶이 ‘현재진행형’으로 흐르는 도시라면,
브뤼헤는 시간을 완벽하게 진공 포장해 놓은
‘과거완료형’의 도시다.


매일 나노 단위의 패턴을 깎아내며
날 선 현실과 씨름하는 엔지니어의 삶(Etch).
그 예리한 감각을 잠시 내려놓고 싶을 때,
나는 이 완벽히 멈춰 선 중세의 정물 속을
그저 천천히 걷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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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다시 벨기에를 찾게 된다면,
그 이유는 이 도시가
‘보존된 시간’의 가치를
다시 떠올리게 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벨기에 도시는,
루벤스의 붓터치가 살아 있는 도시.
안트베르펜(Antwerpe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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