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04: 안트베르펜 - 스케일

거대한 시계 아래에서 내가 작아지고, 그래서 더 선명해진 마음

by JP 정표

겐트(Ghent)가 ‘흐르는 삶의 풍경화’였다면,

브뤼헤(Brugge)는 ‘완벽하게 박제된 정물화’였다.


그리고 오늘의 도시는
벨기에에서 가장 큰 결을 가진 곳, 안트베르펜(Antwerpen)다.


이곳은 풍경도, 전설도, 예술도 모두 ‘크기’로 말한다.
스케일(Scale), 그것이 앤트워프의 첫인상이었다.



1. 도시를 여는 첫 장면 — 스케일

안트베르펜(안트워프) 중영역 (Antwerpen-Centraal)

이곳은 기차역이 아니라 하나의 성당에 가깝다.

웅장한 유리 돔 천장, 세월의 무게가 고루 묻은 기둥들,
그리고 수많은 여행자를 품어온 대리석의 결.



브뤼헤에서 느꼈던 섬세한 중세의 감각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역사를 나서며 처음 맞닥뜨린 것은
커다란 은색 ‘손(Hand)’ 조형물이었다.
도시 이름 ‘Antwerpen’의 어원이
‘손(Hand) + 던지다(Werpen)’라는 전설에서 비롯된 상징.


거인의 손을 잘라 스헬더 강에 던져
도시를 지켜냈다는 영웅 브라보의 이야기.
앤트워프는 처음부터 서사로 도시를 설명하는 곳이었다.



2. 성당 앞에서 — 전설과 아이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앤트워프의 심장부, 성모 마리아 대성당(Cathedral of Our Lady).


겨울의 찬 공기 속에서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였고,

우리 아이 둘은 아무 일 없듯 장난을 치며 웃고 있었다.


앤트워프 성당 앞에서 —
도시의 스케일 속에서도 흐르는 ‘삶의 온기’


그 순간 문득 떠올랐다.
바로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


네로와 파트라슈가
바로 이 대성당 안에서
조용히 마지막 잠에 들었던 그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슬픔의 끝으로 기억되는 장소지만,
그와 똑같은 자리에서
나의 두 아이들은 웃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상실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이곳에서 새로운 기억을 만든다.
도시가 품고 있는 ‘시간의 겹’이
이토록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의 웃음이 조용히 알려주었다.


3. 예술이 시간을 멈추는 순간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 자체가 달랐다.


어둠과 빛, 고요함과 무게 사이에서
14세기 장인들의 혼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정교한 목조 설교단, 하늘을 찌르는 아치,
그리고 루벤스의 그림들.


앤트워프는 루벤스의 도시다.
화려하지 않은 대신, 묵직하게 감긴다.


“예술이란, 시간을 잠시 멈추는 기술이다.”


벨기에에서 가장 자주 떠올린 문장이
바로 이 공간에서 완성되었다.


겐트에서 만났던 ‘살아 있는 삶’은
이곳에서는 ‘위대한 역사’가 되어 걸려 있었다.




도시의 맛 — 현재와 과거가 겹치는 자리

항구 도시답게 앤트워프의 맛은 풍성했다.

싱싱한 홍합, 맛조개, 깔라마리,
그리고 바삭한 피시 앤 칩스.



어느 저녁에는
부드럽게 조리된 고기와 관자,
화이트 아스파라거스의 단맛이 어우러진
파인 다이닝을 즐겼다.


중세 건물 아래에서
현대적 음식과 음악이 펼쳐지는 순간.
이 도시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났다.


앤트워프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부딪히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5. 스케일과 서사, 그리고 저

겐트가 ‘분위기’였고,
브뤼헤가 ‘완벽함’이었다면,

앤트워프는 스케일서사다.


전설(손), 예술(루벤스),
그리고 지금의 삶(사람과 음식)이
하나의 거대한 결처럼 이어진 도시.


‘저녁이 있는 삶’은
때로 이런 웅장한 서사를 천천히 걸으며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다.


아이들 웃음과 네로의 그림자,
루벤스의 붓끝과 항구의 바람이
한 도시 안에서 겹쳐지는 순간.
앤트워프는 그런 도시다.


다음 편은,
정치·문화·이민·일상의 모든 결이 교차하는 도시,
브뤼셀(Brussels) 이야기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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