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05: 브뤼셀 - 빛과 그림자

엔지니어가 본 빛과 그림자의 수도, 브뤼셀

by JP 정표

겐트의 활기, 브뤼헤의 정물화,

앤트워프의 예술을 지나 소개할 도시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Brussels)이다.


벨기에에서 보낸 약 2년의 시간 동안
우리가 테르뷔렌(Tervuren)에 정착하기 전 몇 주를 머물렀던 곳이자,
생활권에서 가장 자주 마주한 대도시.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브뤼셀은 나에게 마냥 아름답기만 한 도시는 아니었다.


1. 빛의 도시, 엔지니어의 시선으로 보다

브뤼셀의 중심인 그랑플라스(Grand Place)는

정말 "말 그대로" 압도적이다.


빅토르 위고가 남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문장은 과장이 아닌,

팩트(Fact)에 가까웠다.

고딕 양식의 시청사, 금장을 두른 길드하우스.

밤이 되자 이 모든 건물이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보석 상자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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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브뤼셀에서 나를 가장 강하게 흔든 것은

의외로 그랑플라스가 아니라 아토미움(Atomium)이었다.


1958년 엑스포를 기념해 만들어진 구조물.
철(Fe) 분자 구조를 1,650억 배 확대한 모습.


아이들에게는 단순한 ‘은색 공’이었겠지만,
화학 전공에 반도체 공정을 다뤄온 연구자인 내게
아토미움은 기술의 꿈을 시각화한 거대한 조형물이었다.


하늘을 찌르는 튜브와 연결된 구체들.
현미경 속 미시 세계가
현실의 건축물로 확장된 듯한 풍경.


그랑플라스가 과거의 빛이라면,
아토미움은 미래의 상상력이다.

브뤼셀은 이렇게 과거와 미래가 한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Co-exist)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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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도가 가진 무게와 현실

하지만 브뤼셀은
낭만만 찾기엔 너무나 현실적인 도시다.


테르뷔렌에서 브뤼셀로 향하는 도로는 늘 정체였고,

시내 주차는 전쟁이었다.

유럽의 여느 대도시처럼 치안 문제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머무는 동안에도 들려오던 총기 사건 같은 불안한 뉴스들.

그래서 가족과 함께 브뤼셀을 찾는 횟수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브뤼셀에서의 첫 쇼핑이 유니클로였다니."


최근 발간한 그래서, 《"유럽에 가면 저녁이 있습니까?"》 에서
언급했던 그 유니클로 매장이 바로 브뤼셀이었다.

벨기에 도착 직후 수하물이 분실되어,

당장 입을 옷을 사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갔던 기억.


그날의 당혹스러움과 혼란.

나에게 브뤼셀은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그저 ‘냉정한 현실’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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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럼에도, 브뤼셀은 맛있었다

그 복잡함 속에서도 브뤼셀을 다시 찾게 만든 건,

결국 '맛'이었다.


냄비 가득 담긴 따끈한 홍합찜과 바삭한 감자튀김의 조합,

벨기에의 소울 푸드 물 프리트(Moules-frites).

종종 가족과 함께 해산물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나눠 먹던 식탁은

낯선 도시의 피로를 잊게 해주는 또 다른 형태의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거리에서 불현듯 만난 와플의 달콤함,

성 미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주던 고요한 위로,

그리고 작지만 유명한 오줌싸개 동상(Manneken Pis)의 엉뚱한 유머까지.

브뤼셀의 팍팍함을 견디게 한 건, 이런 작고 소소한 위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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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복잡함 속에서 균형을 찾는 일

브뤼셀은 겐트처럼 활기 넘치지도,

브뤼헤처럼 고요하지도 않다.


아름다움과 혼란,
역사와 현실이
한꺼번에 뒤섞인 비정형(Amorphous)의 도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브뤼셀에도 저녁이 있는가?”


브뤼셀의 저녁은
그랑플라스의 화려한 빛이기도 했고,
복잡한 도심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내가 배운 건 하나였다.


‘저녁이 있는 삶’은 완벽한 평화가 아니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스스로 작은 아름다움과 균형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브뤼셀은 그 균형을 묻고,

또 가르쳐주는 도시였다.


(다음 편은,

절벽과 강물이 만든 압도적인 수직의 도시,

디낭(Dinant) 이야기로 이어진다.)


JP 정표, Etch the Life 유럽: 브뤼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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