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06: 디낭 - 강의 여백

거대한 암벽과 강이 빚어낸 몰입의 도시

by JP 정표

겐트의 활기, 브뤼헤의 정물화,

앤트베르펜의 스케일과 브뤼셀의 서사를 지나—

이번에 소개할 벨기에의 도시는 디낭(Dinant)이다.


뫼즈(Meuse) 강변에 거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들어선 이 도시는
나에게 한 단어로 요약되었다.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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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초에 벨기에 생활을 준비하며

비자를 받으러 찾아갔던 서울의 주한 벨기에 대사관.

긴장한 채 의자를 옮기다 문득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암벽 아래 놓인 양파 모양의 종탑,
그리고 강물 위에 부서지는 햇빛.


“벨기에에 이런 곳이 있다고?”


몇 달 뒤, 그 사진 속 장면이
현실로 눈앞에 펼쳐졌을 때의 전율.
상상이 현실을 과장할 때가 많지만,
디낭은 예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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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물은 흐르고, 암벽은 버틴다

디낭에서는 시선이 도망칠 곳이 없다.
뫼즈 강을 따라 늘어선 파스텔톤의 건물들,
그 뒤로 수직으로 솟아오른 암벽 요새(Citadel of Dinant).


마치 신이 거대한 조각도를 들고
바위를 한 번에 잘라낸 듯한 압도감이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암벽 위 요새에 오르면
전경은 더 넓고 더 깊어진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강물,
그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유람선.


흐르는 강물과
묵직하게 버티는 암벽.


이 두 개의 수직과 수평이 만들어내는 안정감 속에서
나는 묘한 평화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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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돌 틈에서 피어난 재즈의 선율

디낭은 의외로 ‘소리’의 도시다.
색소폰을 발명한 아돌프 삭스(Adolphe Sax)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샤를 드 골 다리(Charles de Gaulle Bridge) 위에는
다채로운 색의 색소폰 조형물이 늘어서 있다.


거대한 암벽 도시가

색채와 음악의 리듬으로 생기를 얻는다.


강변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색소폰 선율이 들리는 듯한
공감각적 착각이 찾아온다.

자연의 웅장함과 인간의 예술이 조용히 겹쳐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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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연이라는 거대한 엔지니어

도시 외곽의 로쉐 바야르(Rocher Bayard)로 차를 몰았다.

수직으로 갈라진 바위틈 사이로 이어지는 도로.


나는 매일 반도체 칩 위에

나노 단위의 회로를 새기기 위해
깎고(Etch) 깎는 일을 한다.


하지만 수천만 년 동안
바람과 비가 깎아낸 자연의 단면 앞에서는
인간의 기술이 얼마나 작은지
조용히 깨닫게 된다.


자연은 거대한 엔지니어다.
그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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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몰입 — 저녁이 있는 삶의 또 다른 이름

디낭에는 화려한 쇼핑몰도, 북적이는 광장도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완벽한 아름다움과 평화를 품고 있는 도시.


대사관 벽면의 사진 한 장이
현실이 되는 순간, 나는 ‘저녁이 있는 삶’의
또 다른 정의를 배웠다.


그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머릿속의 복잡한 패턴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 여기’에 완전히 몰입하는 일.


그 몰입이 주는 조용한 충만함.
그것이 디낭이 내게 가르쳐준
가장 사적인 휴식의 기술이었다.


다음 편은 왈롱 지방의 뜨거운 심장,
리에주(Liège) 도시 이야기로 이어진다.


JP 정표, Etch the Life 유럽: 디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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