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와 과거가 한 도시 안에 공존하는 곳
앞선 글에서 ‘Buy the Way’라는 문장을 통해
제20대의 비릿하고 짭짤했던 ‘폐기 도시락’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그 시절이 주변의 열기를 삼키며 에너지를 비축하던
하나의 흡열 반응이었다면,
루벤 이야기는
그 에너지가 조용히 세상 밖으로 흘러나와
빛을 내고 있는 순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차가운 편의점 구석이 아니라,
황금빛 시청사가 내려다보이는 벨기에의 광장.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 대신,
화이트 와인의 향이 감도는 홍합찜 냄비 앞.
그 긴 시간의 축적을 지나 도착한 곳,
조용히 나를 성장시켜 준 도시—루벤(Leuven).
벨기에에서 보낸 2년.
이번 도시는 그 두 해 동안 내가 가장 자주 발을 디뎠던 도시,
루벤(Leuven) 이야기다.
테르뷔렌(Tervuren) 집에서 차로 15분 남짓.
주말이면 가장 먼저 떠올랐고,
엔지니어로서의 내 정체성이 향하던 곳.
그리고 매일 아침, 긴장과 설렘을 안고 도착하던
나의 출근길의 마지막 풍경.
2년간 파견 근무로 몸담았던 유럽 최대의 반도체 연구소,
IMEC 컨소시엄이 바로 이 도시 한복판에 있었다.
반도체 엔지니어에게 IMEC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처음 IMEC 건물을 마주했을 때의 감각이 아직 생생하다.
유리와 금속이 층층이 기하학처럼 쌓인 그 구조물 위로 구름이 흘러가던 순간.
마치 "시간보다 앞서가는 건물"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최첨단 연구소에서 불과 몇백 미터만 걸어 나오면,
중세의 향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아렌버그 성(Arenberg Castle)이 위용을 드러낸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고풍스러운 성이 현재 KU Leuven 대학 공학부 건물로 쓰인다는 점이다.
한쪽은 반도체의 미래
나노 단위의 세계를 탐구하는 실험실.
다른 한쪽은 중세의 성벽을 품은 강의실,
수백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공간.
이 극단적인 대비와 조화,
그것이 루벤이 가진 도시의 본질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배웠다.
연구와 삶, 미래와 과거는 서로 분리된 세계가 아니라,
한 공간 안에서 완벽하게 공존할 수 있음을.
루벤에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루벤 시청사(Stadhuis)의 야경을 택한다.
겐트의 조명은 따뜻하고,
브뤼헤가 클래식하고,
앤트워프가 웅장하다면,
루벤의 야경은 ‘정교함’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린다.
수십 개의 조각상 하나하나 빛이 스며들고,
그 조각된 면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까지 도시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그 맞은편 묵직한 축처럼 서 있는 성 베드로 성당(St. Peter’s Church)까지.
그 풍경을 바라볼 때마다 엔지니어의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시간이 이렇게도 세밀하게 새겨질 수 있구나”
루벤은 나에게 일터이기도 했지만,
‘저녁이 있는 삶’을 실천했던 도시였다.
도시는 크지만 곳곳에 녹지와 공원이 둘러싸여 있고,
햇살이 부드러워지는 계절이면
테르뷔렌 공원뿐 아니라 루벤의 공원에서도
우리 가족은 종종 해 질 녘 산책을 하곤 했다.
‘저녁이 있는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가 천천히 저물어가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
사람의 일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완전한 정지(Stop)가 아니라,
속도가 느려지는 순간(Deceleration)이었다.
루벤은 그 균형을 내 손에 쥐여준 도시였다.
루벤에서의 작은 즐거움도 여전히 선명하다.
광장 식당에서 맛보던 뜨끈한 홍합찜,
그 냄비에서 올라오던 셀러리와 화이트 와인의 향.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이하우스(Neuhaus)에 들러
프랄린 초콜릿 하나를 사서 길에서 바로 베어 물던 순간.
입안에서 천천히 녹아내리던 그 달콤함은
이방자이자 ‘생활자’가 쉽게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루벤은 그렇게 조용히 알려주었다.
성장은 요란하지 않지만, 분명히 쌓인다. (Deposition)
지금 한국에서 다시 일상의 속도를 맞추는 나는
그때의 루벤처럼, 조용히 또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다음 편은 벨기에 여행의 마침표, '벨기에가 선물한 8개의 저녁' 에필로그로 이어진다.
JP 정표, Etch the Life 유럽 - 벨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