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간과 계단이 가르쳐준 도시의 깊이
겐트의 흐르는 풍경, 브뤼헤의 박제된 정물,
앤트워프의 웅장한 서사, 브뤼셀의 복합적인 현실,
그리고 디낭의 눈부신 아름다움까지.
벨기에의 도시들은 각기 다른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리에주(Liège)는 조금 특별한 결을 가진 도시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에는 기대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도시를 걷는 순간마다 리에주는 예상밖의 깊이와
‘삶의 흔적’이라는 묵직한 레이어(layer)를 드러냈다.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오랜 세월을 버텨낸 건물들의 ‘중력’이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진 고풍스러운 건축물들.
사진 속 화려함보다는,
“나는 오래되고, 단단하다”라고 말하는 듯한 조용한 존재감.
리뷰나 여행지에서 흔히 보던 벨기에의 로맨틱함 대신,
리에주는 시간 그 자체의 무게를 먼저 내게 건넸다.
리에주의 진짜 매력은 도시의 중심이 아니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속에서 빛을 발했다.
간판도, 장식도 없는 작은 가게.
벽을 타고 올라가는 넝쿨.
창문 너머로 스치듯 보이는 평범한 일상.
그 모든 요소가 자연스럽게 포개져
‘관광지로서의 리에주’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도시로서의 리에주’를 만든다.
걷는 속도를 조금만 늦추면
도시는 어느 순간 여행자를 부드럽게 품어준다.
리에주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장소.
바로 몽뉴(Montagne de Bueren)다.
이 가파른 계단은 원래 19세기,
외부 침입 시 병사들이 요새로 한 번에 올라가기 위해 만든 군사적 방어선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몽뉴는 전쟁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제 이 374개의 계단은
각자의 속도로 ‘삶의 해발고도’를 시험하는 곳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한 걸음씩 계단을 올랐다.
숫자가 늘어날수록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하지만 정상에 서서 마주한 전경은 그 모든 수고를 단숨에 보상했다.
도시가 발아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그 순간,
왜 이 계단이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특별한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정상에서 본 풍경은 단순한 성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밀어 올린 시간에 대한 보상이었다.
리에주는 처음엔 낯설고 단단하게 느껴졌지만
걷고, 오르고, 바라보는 시간 속에서
도시 곳곳에 스며 있는 삶의 이야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벽돌, 휘어진 골목,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의 리듬.
그 모든 풍경은
오래도록 이곳을 살아낸 사람들의 숨결과 기억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결(Texture)’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도시에 조심스레 묻고 싶었다.
“그래서, 유럽에 가면 저녁이 있습니까?”
리에주의 저녁은 화려한 유흥이 아니었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서 천천히 가라앉는 성취감,
오래된 도시의 고즈넉한 실루엣 속에서 찾는 작은 평화였다.
눈부시지는 않지만 오래 남는 도시.
화려하지 않지만 묵직하게 스며드는 도시.
그것이 내가 만난 리에주였다.
다음 편은,
벨기에의 지성과 젊음이 살아 있는 도시,
루벤(Leuven) 이야기로 이어진다.
JP 정표, Etch the Life 유럽: 리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