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 그리고 엄마를 위한 퇴사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 제과제빵 직종 2위 수상을 하고 난 뒤,
예정대로 SPC 양재본사에 가서 근로계약서를 썼다.
내 이름이 적힌 계약서를 바라보며
'이제 진짜 사회로 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정 점포는 파리바게트 신사점.
원래는 집 근처인 파리바게트 수원점을 희망했지만
이미 근무 인원이 꽉 차 있었다.
'자리 나면 꼭 연락드릴게요.'
그 말을 믿고, 일단 신사점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집에서 파리바게트 신사점까지는 편도 1시간 30분.
이마트 다닐 때보다 더 일찍 나와야 했다.
새벽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시간,
빨간 버스 첫차를 타고 창밖을 멍하니 보며
반쯤은 졸고, 반쯤은 긴장한 채로
겨우 7시 30분쯤
파리바게트 신사점에 도착했다.
첫 출근 날,
매장 문을 여는 순간 특유의 갓 구운 빵냄새가 훅 들어왔다.
내가 앞으로 매일 마주하게 될 냄새였다.
주방으로 향해 쭈뼛쭈뼛 어색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자, 계장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이 첫날이지? 긴장하지 말고, 하나씩 배워가면 돼.'
이마트에서 이미 어느 정도 현장 경험은 있었지만,
파리바게트 빵 성형 방식, 도구 위치, 매장 동선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아, 비슷한 듯하면서도 정말 다르구나.'
그래도 이마트에서 오븐과 냉동생지, 기본 성형을 해본 덕분에 아예 바닥에서 시작할 때 보단 훨씬 수월했다.
직접 일해보니,
두 직장은 확실히 결이 달랐다.
이마트 베이커리는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가 중요했다.
숫자와 매출 그래프가 모든 걸 말해주는 곳.
반면 파리바게트는 같은 빵이라도
'얼마나 고르게 부풀었는지, 크림이 정량인지',
'품질'이 먼저였다.
'빵이 예쁘게 나와야 손님이 또 온다.'는
그 말을 몸으로 배우게 된 곳이기도 했다.
나는 이마트에서 하던 방식대로 빠르게, 많이 굽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빵이 왜 그래? 안 이쁘잖아. 빨리 하는 거도 좋은데,
그래도 최대한 이쁘게, 정량도 지켜야 돼.'
그날 이후로
이마트에서 몸에 밴 습관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파리바게트의 속도와 기준에 맞춰 조금씩, 조금씩 내손을 고쳐 나갔다.
파리바게트에서의 총경력은 6년.
신사점 1년, 양재점 6개월, 수원점 4년 6개월.
그리고 파리바게트와의 시간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건 결국 '사람' 덕분이었다.
돌아보면, 파리바게트에서 내가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일'보다, 사람'이었다.
청각장애가 있는 나를
반쯤은 이해하려고,
반쯤은 기다려주며,
편견 대신 배려를 건네준 사람들.
힘들었던 기억보다 고마웠던 얼굴들이 먼저 떠오른다.
일이 끝난 날
'오늘 밥 고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봐주던 동료들.
지친 하루 끝에 웃으면서 먹는 그 한 끼가
내게는 '너도 우리 팀이야'라는 말과 같았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에 오래 남는 세 사람이 있다.
신사점 계장님, 양재점 사원, 그리고 수원점 계장님.
신사점 계장님은 여자 계장님이셨는데,
빵 기술이 정말 뛰어났고
내가 여태까지 봐온 사람 중 가장 멋있으신 분이었다.
말로 길게 설명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뒤에서 묵묵히 보여주는 스타일.
그 손을 보며 배우는 게 정말 많았다.
1년 동안 함께 일하며,
언니 같으면서도, 때로는 선생님 같았다.
내가 실수하면 단호하게 혼내고,
빵이 잘 나오면 또 솔직하게 칭찬해 주셨다.
마치
'어디 가서도 무시 안 당하게,
손 기술부터 확실히 챙기자.'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회식 자리에서도, 밥 먹으면서도,
내가 못 알아듣는 부분이 있으면 굳이 한 번 더 돌아서 설명해 주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늘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계장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덕분에 다른 점포로 발령 나서도
'빵이 왜 이렇게 예뻐?
어떻게 했어? 잘 배웠네.'
라는 칭찬을 꽤 많이 들었다.
그 말들 뒤에는,
언제나 신사점 계장님의 손이 있었다.
양재점에서는 나와 동갑인 사원을 만났다.
책임감도 강하고, 멘탈도 강해서
힘든 상황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던 사원.
같은 또래라면
왠지 거리 두고 지낼 수도 있는데,
그 친구는 나를 그냥 '수민이'라고 불러줬다.
우리는 동료이면서도 10년 지기 친구처럼 티격태격했다.
내가 힘들어도 그 친구랑 농담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끝나 있었다.
그때 대화와 웃음이 지금도 문득 떠오른다.
보고 싶은 얼굴이다.
마지막으로, 수원점 계장님.
어쩌다 보니 나는 빵집에서 엄마를 또 한 분 더 얻게 됐다.
계장님은 늘 나에게만
반찬이랑 먹을거리들을 따로 챙겨주시며,
'이거 집에 가서 엄마랑 같이 먹어.'
라고 조용히 말씀해 주셨다.
장애가 있다고 하면
조심스럽게 선부터 긋는 사람도 많은데,
이 분은 벽 대신 팔을 내밀어주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힘들어도, 이 사람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버틴다.'
파리바게트에 더 오래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아닌 엄마의 몸에서 먼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복결핵으로 9개월 동안 약을 복용해야 했고,
그 사이에 기관지 확장증 병명을 붙었다.
약을 너무 오래 많이 먹다 보니
부작용으로 여기저기가 아프셨다.
거기에 코로나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원인 모를 두통과 어지러움까지 겹쳤다.
엄마 상태가 급격하게 안 좋아질 때마다 급히 병원으로 향했고, 응급실도 여러 번 다녀왔다.
나는 출근 전마다 엄마에게 물었다.
'오늘 컨디션 어때? 좀 괜찮아?'
어느 정도 버틸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바닥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내 마음에서 났다.
'빵은 다시 구울 수 있어도,
엄마의 시간은 다시 못 굽는다.'
결국 나는 파리바게트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퇴사서를 쓰는 손이 떨렸다.
엄마의 건강 악화,
원치 않았던 평택 이사,
파리바게트 분당서울대병원점 발령까지.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이 쏟아졌다.
바닥을 손으로 더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억지로라도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조만간 좋은 일도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정말로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퇴사 후,
나는 '직장인'이 아니라, '간병하는 딸'이 되었다.
엄마 약 챙기기, 병원 동행, 입원과 수술, 식사 챙기기.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한편에는 작은 불씨를 하나 더 붙였다.
'대한민국 여성 장애인 1호 제과기능장'
'언젠가, 엄마가 조금이라도 괜찮아지면 그때는 나도 다시 내 꿈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마음속 깊은 곳에 조용히 적어두었다.
파리바게트에서의 6년은
몸도 힘들었고,
마음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사람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6년은,
나를 제과기능장으로 향하게 밀어 올린
긴 예고편 같은 시기이기도 했다.
언젠가,
그 시간들을 모두 데리고
나는 다시 가운을 입고, 칼을 쥐고, 불 앞에 설 것이다.
그때도 나는
오늘 이 말을 기억하고 싶다.
'힘들어도, 나는 끝까지 내 손으로 구워낸 인생을 살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제과기능장'이라는 더 가파른 길 앞에 선다.